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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시조] 현수막 가라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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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호의 時부렁調부렁]

[사설시조] 현수막 가라사대

시인 김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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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호의 時부렁調부렁 7

현수막 가라사대

김선호 

 

  한 번이 어렵다니께, 둘째부터는 일도 아니제

 

   내사 마 소싯적에는 백옥보다 하얬니라 겉만 우찌 그랬겠노 속도 참말 순했데이 밖으로 나오는 날은 눈도 지대로 못 떴니라 자연인인가 뭔가 하는 테레비 프로 안 있드나 그네들처럼 백혀 있으니 시상 물정 우찌 알겠노 사방이 번쩍번쩍하니 간이 콩알만 해지데 근데 말여 착해 빠져도 결기만은 쥐고 있었제 아니다 싶을 때는 이 악물고 버텼으니께 답지를 백지로 내니께 혀를 끌끌 차드만

 

  변해 가는 시월 탓인지 내도 자꾸 물든데이 처음에는 그래도 좋은 쪽만 넘봤었제 잘살자 축하한다 뭐 이런 말은 괜찮으니께 근데 말여 요즘에는 그런 기 안 통하드만 쌍욕을 걸러 붓고 뻘건 칠을 해가지고 사변 때 총질해 대듯 그래야만 살아나니께 뭔 노무 자랑질은 또 그렇게 해 쌓는지 뻥튀기맨치로 부풀리고도 눈 하나 깜짝도 안 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백주대로를 활개치니께

 

  내사 마 요래 망가질 줄을 생각이나 했겄냐 말여 

백지 현수막이라도 걸어 속을 좀 달래볼까 [ 이미지 :류우강 기자]

  “교묘한 웃음에 보조개여, 아름다운 눈에 또렷한 눈동자여, 소박한 마음으로 무늬를 만들었구나이게 무슨 말씀이냐고 자하가 묻는다.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다음이다. 하얀 바탕없이 그림을 그릴 수 없듯 소박한 마음의 바탕 없이, 눈과 코와 입의 아름다움만으로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다라고 공자가 답하신다.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고사는 이렇게 사제 간의 대화에서 생겨났다.

 

  하양은 순결의 상징이다. 청순과 청결, 성스러움 같은 긍정적인 이미지를 불러온다. 현수막은 흰색 바탕에서 시작한다. 하고 싶은 말을 쓰고 색칠하고 그림도 그린다. 영예로운 입상자 축하나, 허리띠 졸라매자는 호소나, 국경일 경축 같은 현수막들은 순수했다. 순결을 잃어가는 하양 입장에서도 뿌듯했을 것이다.

 

  요즘 현수막은 살벌하다. 상대를 비방하고 잘못을 꼬집는다. 아니면 말고 식의 허위사실도 부지기수요, 자화자찬은 염치를 팽개친 지 오래됐다. 선거 때면 더 극성을 부리는데, 거리마다 눈살 찌푸리는 수사가 넘쳐난다. 소박한 바탕없는 그 외침들이 유권자의 마음을 훔칠 수 있을까? 백지 답안 내던 그때처럼, 백지 현수막이라도 걸어 속을 좀 달래볼까?
 

김선호  시인,  코리아아트뉴스 문학전문기자  
 

김선호 시인

조선일보 신춘문예(1996)에 당선하여 시조를 쓰고 있다시조를 알면서 우리 문화의 매력에 빠져 판소리도 공부하는 중이다직장에서 <우리 문화 사랑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으밀아밀』등 네 권의 시조집을 냈다. 코리아아트뉴스 문학전문기자로 활동하며, 충청북도 지역 문화예술 분야를 맡고 있다.

시인 김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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