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해설] 김광림의 '괜한 소리'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5 ]
괜한 소리
김광림
혈압 때문에 술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한 중학 동창은
마지막 대작을 위해 일부러 나를 찾았단다
반세기가 넘어도 상기 ‘야’ ‘자’로 통하는 사이가
마냥 즐겁기만 하다.
한때는 혀가 굳어져 제대로 말도 못했다며
다시 굳어지기 전에 꼭 해야겠다고
느닷없이 들고나온 한마디
—야, 너 집 떠날 때 아버지한테 얘기했니?
국회 청문회인들 이보다 더 가슴에 맺힐까
간신히 기어드는 목소리로
—아니
라고 대꾸하긴 했지만
금방 가슴속의 응어리가 터질 것만 같다.
—이 자슥아! 너 아버지가 누이동생을 앞세워 우리 집에 찾아오셨단 말야
너 어디 갔느냐고 물으시길래 나도 놀랐지 무슨 말씀이냐고 되물었지만……
—제 에미도 동생들도 다 모른다니 이놈이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야
걱정이 태산 같으시더라.
하긴 그래
어머니는 자식이 잘 되는 일이라면
무슨 짓인들 말렸을까
남행열차를 탄 내게 마냥 손을 흔들어쌌던
누이의 모습이 지금도 삼삼한데
아버지의 노여움에
모두가 모른다고 잡아뗀 모양이다.
—야 이 자슥아 정신차려
올해 부모님 춘추 어떻게 되시니
기세가 등등해진 녀석은
취기까지 가세하여 사뭇 심문조다.
—그래 아버지가 나를 스물하나에 어머니가 열아홉에 두셨으니까 여든여덟에 여든여섯이 되셨을 거야.
그만 울먹이는 소리가 돼버렸는지
‘야’ ‘자’ 하던 친구가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
—아냐 잘했어
내 따귀 실컷 갈겨주지 않을래
이승에선 다시 못 뵈올 부모님 생각에
기어이 울음보를 터뜨리고 싶어
상기된 얼굴을 들이대자
이번엔 ‘야’ ‘자’가
잘못 눈물단지 건드렸나 싶었던지
시무룩한 목소리로
—아무래도 내가 괜한 소리 했나 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어쩌랴.
―『김광림시전집』(바움커뮤니케이션, 2010)에서
![내가 괜한 소리를 했나 [이미지: 차진 기자]](/_next/image?url=https://cdn.presscon.ai/prod/125/images/20250305/1741133935272_866567107.jpeg&w=828&q=100)
<해설>
오늘 아침 <조선일보> ‘일사일언’ 코너에 「3년이 77년이 될 줄 알았더라면...」라는 짧은 칼럼을 발표하였다. 북한이 고향인 다섯 명 시인이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남한에 와 있었고, 정전협정이 이뤄진 뒤에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김광림ㆍ김규동ㆍ전봉건ㆍ구상ㆍ함동선 시인의 애타는 사모곡을 다뤘는데 너무 길다고 구상ㆍ함동선 시인에 대해 쓴 대목은 잘려나가고 말았다.
다들 전쟁이 끝나면 북한에 가서 어머니를 뵐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웬걸, 어머니의 생사 여부도 모른 채 네 시인은 숨을 거뒀고, 함동선 시인은 생존해 계신다.
제목 ‘괜한 소리’는 혈압이 높아 술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마지막 대작을 위해 찾아온 중학 동창의 입에서 나온 두 가지 질문인 동시에, 시인 스스로 자신의 대답을 ‘괜한 소리’로 규정한 자탄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동창생 노인은 마지막 대작이겠다, 술을 마신 김에 평소에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있어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늙은 시인 친구는 울먹이는 소리로 대답하고, 급기야 울음보를 터뜨릴 듯 상기된 얼굴이 된다. 그러자 노인은 “아무래도 내가 괜한 소리 했나 보다”라고 시무룩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려 시의 제목이 ‘괜한 소리’가 되었다.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인 김광림의 본명은 김충남이다.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 김광균과 김기림이었기에 이름에서 한 자씩 떼어와 필명을 지었다. 두 사람 다 서울에서 살고 있었기에 두 사람을 존경하고 동경하여 단신 월남한다. 1948년 당시의 북한은 시를 쓸 분위기가 아니었다. 화폐개혁과 토지개혁은 그렇다 치고, 김광림이 판단컨대 공산주의 실현과 개인의 자유는 거리가 아주 멀다고 여겨졌다. 일제강점기 때의 지주와 종교인, 경찰 가족과 관료 가족은 비판의 대상이었고, 당국은 이들의 재산을 다 몰수했다. 빈털터리로 남으로 갔다.
김광림은 부모와 형제 누구한테도 자신의 남행을 얘기하지 않았다. 등단하고 시 발표하고 시집을 내려면 서울에 가야지, 이런 시골에 있으면 죽도 밥도 안 되겠다고 생각했기에 남행을 결심했을 뿐, 이산가족의 일원이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몇 년 지나면 살벌하기 이를 데 없는 시대의 분위기도 많이 가라앉을 것이고, 등단하고 시집 낸 뒤에 금의환향할 생각을 갖고서 서울에다 일단 둥지를 틀었다. 그러다 전쟁이 일어났고 김광림은 육군 소위로 참전하게 되었다. 북진하는 대열 속에서 고향 원산에 도착해 자기 집에 가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된다. 구상 시인도 마찬가지였다. 원산에 가보지 못한 것이 너무나 큰 불효로 뇌리에 남게 된다.
세월은 가뭇없이 흘러 대한적십자사에서 제안해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남북 회담이 수십 차례 열린다. 그 결과, 지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던 이산가족이 만나게 된다. 그런데 김광림은 부모님의 연세가 워낙 많아서 돌아가셨는지 신청을 해도 소식이 오지 않았다.
김광림 시인은 생의 말년 10년 동안 깊은 침묵의 세계에서 살다가 작년 6월 9일에 작고하였다. 친구가 대신한 두 가지 질문은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을 치고, 쓰리게 하고, 결국은 뜨겁게 달아오르게 해 눈시울까지 뜨거워진다. “걱정이 태산 같으시더라.” 이 한 행 속에는 아버지의 정이 흘러넘치고 있다. 자식이 말 한마디 없이 사라졌기에 찾아내기 위해 동네방네 물으면서 다녔던 아버지가 안쓰럽다. 북한의 아버지는 장남의 소식을 전혀 알아내지 못한 채 임종을 맞았을 것이다. 남한의 아들도 아버지가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 길이 없으니 평생 불효자라 생각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이 시는 이산가족의 아픔을 두 친구의 대화를 통해 실감나게 보여준 작품이다. 초로(初老)의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중에 분단의 아픔, 실향의 아픔, 이산(離散)의 아픔이 다 담겨 있다. 쉽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면서 폐부를 찌르는 시, 나도 언젠가 이런 시를 써보고 싶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나무 앞에서의 기도』 『사람 사막』 등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