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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산 책다락 22] 알베르카뮈의 '이방인'

효산 남순대 시인
입력
억압적인 관습과 부조리를 고발하며 영원한 신화의 반열에 오른 작품

●책 소개


20세기의 지성이자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 알베르 카뮈
억압적인 관습과 부조리를 고발하며 영원한 신화의 반열에 오른 작품
 

1942년 『이방인』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카뮈는 알제리에서 태어난 젊은 무명작가에 불과했다. 낯선 인물과 독창적인 형식으로 현대 프랑스 문단에 이방인처럼 나타난 이 소설은 출간 이후 한순간도 프랑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빠진 적이 없는 걸작이 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을 겪으며 정신적인 공허를 경험한 당대 독자들에게 카뮈는,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뫼르소라는 인물을 통해 관습과 규칙에서 벗어난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한다. 현실에서 소외되어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이 죽음을 앞두고 비로소 마주하는 실존의 체험을 강렬하게 그린 이 작품은 아직까지도 전 세계 독자들 사이에서 고전 중의 고전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민음사에서는 불문학 최고의 번역자 김화영 교수가 이십 여년 만에 원문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오늘의 독자들에게 보다 친근한 언어로 “새로 번역하다시피 대폭 수정”한 원고를 ‘세계문학전집’ 266번으로 출간함으로써 『이방인』이 독자들에게 보다 깊은 감동을 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시놉시스
 

전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 신화의 반열에 오른 고전


프랑스 파리 갈리마르 출판사의 통계에 따르면 『이방인』은 지금까지 프랑스에서만 모두 733만여 부가 판매되었으며 연 평균 판매 부수는 19만 부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갈리마르 출판사 설립 이래 백여 년의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에 속한다. 『이방인』은 현재 전 세계에서 무려 백한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방인』은 작품 그 자체로 보나 20세기 서사 형식의 역사에 있어서나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작품으로 출판 당시부터 하나의 문학적 ‘사건’이었다. 롤랑 바르트는 이 짧은 소설을 “건전지의 발명”과 맞먹는 사건이라고 압축했다. 가에탕 피콩은 “지극히 현대적인 감수성을 완벽에 가까운 고전적인 형식으로 끌어올렸다.”라고 격찬했고 에마뉘엘 무니에는 “뼛속까지 고전적인, 다시 말해서 의도적이고 정돈되고 군더더기 없는 문체를 지향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거의 청교도적인 이 작가는 내면에 분열의 아픔과 어둠을 간직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1945년에 이미 사르트르는 이런 모든 평가를 종합하는 동시에 이 작품의 가치를 꿰뚫어보며 다음과 같은 예언적인 말을 남겼다.


“카뮈의 어둡고도 순수한 작품 속에서 미래의 프랑스 문학의 주된 특징들을 식별해 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어떤 고전적인 문학을 약속한다. 그 문학은 아무런 환상도 주지 않지만 인간성의 위대함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고, 가혹하지만 불필요한 폭력은 배제하는, 열정적이지만 절제된 문학이다.”


■ 삶과 죽음, 부조리한 세상

-영웅이기를 거부하면서도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순교자 뫼르소

알제에서 선박 중개인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는 젊은 청년 뫼르소는 어느 날 마랭고의 양로원에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 가서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다. 그는 예전 직장 동료였던 마리를 다시 만나 유쾌한 영화를 보고 해수욕을 즐기며 사랑을 나눈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뫼르소는 한 아파트에 사는 이웃 레몽과 친해진다. 레몽은 변심한 애인을 괴롭히려는 계획을 세우고, 뫼르소는 레몽의 뜻에 이끌려 이 계획에 동참한다. 며칠 후 뫼르소는 레몽과 함께 해변으로 놀러 갔다가 그들을 미행하던 아랍인들과 마주친다. 그 아랍인들 중에는 레몽 옛 애인의 오빠가 있다. 싸움이 벌어져 레몽이 다치고 소동이 마무리되지만 뫼르소는 답답함을 느끼며 시원한 샘 가로 간다. 그곳에서 우연히 레몽을 찔렀던 아랍인을 만난 뫼르소는 그가 꺼내는 칼의 강렬한 빛에 자극을 받아 자신도 모르게 품에 있던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교육을 받았지만 신분 상승 욕구나 야심이 없고 생활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 이상할 정도로 주위에 ‘무관심한’ 뫼르소는 우발적 살인 이후 세상에서 ‘이방인’이 되어 버린다. 진실을 왜곡해 자신을 도우려는 변호사도, 하느님을 통해 뫼르소를 감화하려는 재판관도, 구원을 위해 그를 찾아온 사제도, 그 누구도 뫼르소를 진정 이해하지 못하고 뫼르소 역시 주위 세계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뫼르소는 자기 자신의 사건에서 소외되고 만다. “어처구니없게만 여겨지는 죽음에 대한 거부, 자기 스스로의 밖으로 쫓겨난 듯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낯섦, 그리고 이 세계의 불투명한 어둠, 부조리는 송두리째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렇게 타인에 의해 내려진 사형 선고를 받으며 뫼르소는 마지막 유혹, 신앙과 구원의 유혹을 떨치고 자신의 죽음과 정면으로 대면하게 된다.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1913~1960)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1913~1960


프랑스의 작가, 기자, 철학자.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1957년에는 역대 두 번째로 어린 43세의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실존주의자로 분류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러한 평가를 거부했다.
 

1913년 봄, 알베르 카뮈의 아버지 뤼시앵 카뮈는 포도주 도매 및 수출 상회인 리콤 상회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상회가 뤼시앵을 몬도비로 파견하자 카뮈를 임신 중이던 아내 카트린이 9월에 몬도비로 합류했다. 이후 11월 7일, 카뮈는 몬도비에서 태어났다.

프랑스령 알제리 태생이라는 사실에 그를 알제리 아랍계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프랑스는 알제리를 단순 식민지나 명목상으로만 같은 국가에 속해 있을 뿐인 외지(外地)가 아닌 프랑스 본토의 확장된 영토로 취급했다. 그래서 프랑스 본토로부터 새로운 땅에서의 기회를 노리고 이주한 프랑스인, 이른바 피에 누아르들이 많았으며, 카뮈의 아버지 뤼시앵 카뮈나 어머니 카트린 생테스도 그 중 일부였다. 카뮈가 태어날 당시의 알제리는 그저 프랑스라는 국가의 한 지역이었고, 따라서 그는 프랑스 태생이었다.  카뮈가 알제리 태생이라는 말은, 카뮈가 사망(1960)한 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1962)한 현재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즉,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저 프랑스 본토의 알제리 지방에서 나고 자랐을 뿐인 순수 프랑스인이었으며,[ 현재의 알제리 아랍인과는 거의 무관한 인물이다. 당연하겠지만 이슬람을 믿지도 않았다
.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8월 3일 뤼시앵은 알제리 원주민 보병으로 징집당해 프랑스 본토로 투입됐다. 이에 8월 30일 카트린은 두 아들과 함께 친정인 알제의 동쪽 거리인 리옹 로 이주했고, 카뮈는 이 곳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그러다 10월 11일에 제1차 마른 전투에서 부상당한 뤼시앵이 군병원에서 사망했다. 미망인이 된 카트린은 문맹에 청각 장애가 있었고, 그나마 받는 연금도 매우 빈약했기에 가정부로 일하며 살림을 꾸려 나갔다. 훗날 카뮈는 "나는 마르크스를 통해 자유를 배운 것이 아니다. 가난을 겪으면서 자유를 배웠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1921년 카트린과 가족들은 시내 중심에서 더 멀리 떨어져 집세가 더 저렴한 방 3칸짜리 집으로 이사했다. 카뮈는 한 집에서 할머니, 어머니, 형, 외삼촌 두 명과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회초리로 집안의 질서를 잡았고, 외삼촌 중 한 명인 에티엔은 술통 제조공으로 청각 장애, 언어 장애가 있었고 카뮈를 데리고 사냥과 수영을 다녔다.

1923년 동네의 공립학교 2학년이었던 카뮈는 담임이던 루이 제르맹의 눈에 띄었다. 제르맹은 집으로 모친과 할머니를 찾아와 진학을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카뮈는 제르맹에게 무료로 개인 교습을 받고, 중고등부 장학생 시험을 준비하게 됐다. 카뮈는 1957년 12월 노벨상 수상 기념 연설문인 '스웨덴 연설'을 '어머니 다음으로 감사하는 사람'이라고 하며 제르맹에게 헌정했다. 이듬해 장학생으로 선발된 카뮈는 알제의 그랑 리세에 입학한다. 고등학교에서 카뮈는 축구를 즐겼고, 여름이면 철물점, 선박 회사에서 일하며 집에 생활비를 보탰다.


1930년 바칼로레아 시험 제1부에 합격한 카뮈는 가을 학기에 철학 반으로 진급했다. 이곳에서 카뮈는 평생의 스승 장 그르니에(Jean Grenier)를 만난다. 그르니에는 당시 생계를 위해 고등학교 철학 교사를 하고 있었고 중년 이후에는 소르본 대학교의 미학, 예술학 교수가 된 철학자, 작가이다. 그르니에의 제안으로 카뮈는 여러 글을 읽고, 또 직접 글을 쓰기 시작했다. 두 사제는 카뮈가 죽기 전까지 30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편지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 고백이 넘쳐난다. 그러다 12월, 고질병인 결핵으로 쓰러진 카뮈는 더 이상 그의 삶의 기쁨이었던 축구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1931년 카뮈는 치료를 위해 알제의 여러 거처를 전전하다 10월에 철학 반 수업에 복귀했다. 1932년 카뮈는 바칼레로아 시험 제2부에 합격했다. 이에 10월에는 그랑제콜 입시 준비반 1학년에 들어갔고, 친구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글을 썼다.


1933년,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카뮈는 반파시스트 운동 조직인 암스테르담-플레열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다 건강이 악화되어 파리 고등사범학교 입시 준비를 포기하고 알제 대학에서 수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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