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해설] 정상현의 "피"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24]
피
정상현
과도로 사과를 깎다가 피를 본다
내게도 피가 있었구나
썩은 사과 같은 내게도
붉고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었구나
부끄러움이란 무엇인가
이 피에 대하여
피보다 진한 지금 이곳에서의 생생한 목숨에 대하여
너 그동안 너무 무사했다고
문득 섬뜩하게 번뜩이는 칼날 앞에서
피를 본다 사과를 깎다가
겨우 과도로 사과를 깎다가
부끄러움이여 다만 목숨이
한 알의 매끈한 사과를 구하는
이 피가 무엇인가
목숨에 대하여
이 피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사라진 나라를 꿈꾸다』(모아드림, 2003)에서

[해설]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이 시를 쓴 내 4년 후배인 정상현은 지체장애인이자 시각장애인이다. 1991년에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한동안 식물인간의 상태로 있다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으나 뇌졸중 환자처럼 신체의 절반이 굳어 있고 앞을 보지 못한다. 지금까지도. 특수컴퓨터의 자판을 익혀 시를 써 시집을 2권 냈다. 코로나 기간 때 재활을 위한 물리치료가 중단되어 지금은 몸이 더 굳어버렸다. 시 쓰기가 중단된 것이 안타깝다. 하지만 2권 시집의 150편 시편은 대부분이 눈이 먼 상태에서 쓴 것임에, 편편의 시가 진한 감동을 준다.
사과를 깎다가 과도를 잘못 다뤄 피를 본 일이 자신의 경험인지 아닌지 물어보진 않았다. 피를 보았다고 상상하자. 붉고 따뜻한 피가 흘러내리자 "썩은 사과 같은 내" 몸이 피가 돌고 있는 생명체임을 확실히 인지하게 된다. 내 신세를, 내 처지를, 내 신체를 저주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피보다 진한 지금 이곳에서의 생생한 목숨”이라는 구절은 자신의 시각이 교정되었음을 알려준다.
“한 알의 매끈한 사과를 구하는”이라는 표현도 재미있다. 사과한테도 사과하고 나한테도 사과하고 사람들한테도 사과하고 싶다. 나 자신, 이런 상태로나마 살아 있는 것이 대단하지 않은가. 내 몸에 피가 돌고 있다. 나는 목숨을 갖고 있는 생명체이다. 그러니 희망을 잃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정상현 시인]
1964년 전북 전주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대학 시절에 시창작 동아리 ‘작인’ 결성. 출판사 ‘들꽃세상’에서 근무할 때 교통사고를 당함. 시집 『마음의 지옥에서 피우는 꽃』 『사라진 나라를 꿈꾸다』를 펴냄.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나무 앞에서의 기도』 『사람 사막』 등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