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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오세영의 "사랑하는 동생 종주야"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시 해설] 오세영의 "사랑하는 동생 종주야"

KAN 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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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19 ] 
사랑하는 동생아 [ 이미지: 류우강 기자]

사랑하는 동생 종주야

 

​오세영

 

너는 4

나는 8

우리는 그때 외갓집 마당가에 핀

살구나무 꽃그늘 아래서

헤어졌지.

 

네 초롱초롱 빛나던 눈동자에 어리던

그 푸른 하늘이

지금도 기억에 선명한데

네 볼우물에 감돌던 그 천진스런 미소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었지.

 

곧 전쟁이 일어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된 우리는

어딘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생사를 모른 채 우리도

70년을 헤어져 살아야 했구나.

 

예뻤던 내 여동생 종주야

이제 너는 일흔둘,

나는 일흔 하고도 여섯

몸들은 이미 늙었다만 아직도

네 눈빛에 어리던 푸른 하늘과

네 볼우물에 일던 그 귀여운 미소는

여전하구나.

 

종주야, 내 사랑하는 여동생아

이제 우리는 다시

헤어지지 말자

그때 그날처럼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을 외가집 마당가

살구나무 꽃그늘 아래서

다시 만나자.

 

다시는 그 끔찍한 민족의 시련을

겪어선 안 된다.

그때 너는 4살 나는 8.

 

2018825일 금강산 제21차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오세영 시인의 원고 [사진: 본인 제공]

  [해설]
 

  그사이 6년 반의 세월이 흘러갔다. 남쪽의 사촌오빠는 이종사촌동생 라종주(72) 씨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북쪽의 사촌동생은 세영이 오빠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양가가 형제가 많지 않을 경우 4촌간이 형제보다 가까울 수 있다. 게다가 오세영 시인은 무녀독남 유복자로 태어났기에 라종주 씨가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천우신조로 그해 그 자리에서 만나 시를 써 주었으니 바로 위의 작품이다.

 

​  오세영 시인은 라종주 씨의 신청으로 이산가족 2차 상봉에 참가했다. 시인은 여덟 살 때 당시 네 살인 종주를 만났던 기억이 생생하다면서 만나서 얘기를 하다 보니 가족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고 상봉 소감을 밝혔다. 시인은 상봉 첫날인 25일 라씨의 요청으로 사랑하는 동생 종주야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고, 둘째 날인 26일 개별상봉 때 라씨에게 직접 전달했다. 이 시의 생사를 모른 채 우리도/70년을 헤어져 살아야 했구나.”라는 구절을, 비슷한 경험을 한 이산가족이라면 읽으면서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 하늘 아래 이런 비극이 있다니!

 

  북한의 지도자는 뭐가 그리 분한지 스스로 화를 내며 핵미사일 제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산가족이 상봉할 날이 언제쯤 다시 올까. 나의 외할아버지는 가요 <단장의 미아리고개>의 모델이다. 당시 상주지역 국회의원으로서 서울에서 매일 국회로 출근하고 있었다. 전쟁 사흘 만에 한강의 다리들이 다 끊겨 피난을 못 가고 있다 붙잡혀 노랫말 그대로 철삿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미아리고개를 넘어가셨다. 북한은 귀순을 받아주었다고 주장해 외갓집 식구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살아갔다. 누명을 벗은 것은 67년 만인 2017년이었다. ‘귀하를 625전쟁 납북 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 피해자 명예 회복에 관한 법률 제4조에 따라 납북자로 결정합니다.’라는 정부의 서류를 받았을 때, 내 어머니와 3명의 동생은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 땅의 정치상황도 빨리 안정되고 남북한 대화의 물꼬가 다시 틔어 이제 얼마 남지도 않은 이산가족 1세대 분들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리면 좋겠다. 부모 형제의 생사 여부도 모른 채 75년을 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북한에 어머니를 두고 남한에 내려와 있다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남쪽에 주저앉은 전봉건, 김광림, 구상, 김규동, 함동선 시인의 사모곡을 읽고 있노라면 돌아가시기 전까지 자식들에게 아부지 진지 드세요라고 큰소리로 말하게 하고(물론 밥 한 공기를 따로 상에 올려놓고서) 숟갈을 들게 한 외할머니가 생각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2005년 한국 기자단 평양 방문이 있었을 때 북한 당국이 기자에게 알려주었다. 내 외할아버지는 1909년생인데 45세 때인 195424일에 이미 작고했다는 것을.

 

 오세영 시인의 이 시를 읽고 있자니 고모님의 딸, 이모님의 딸인 내 사촌누이가 생각난다. 춘천과 서울에 있어 전화만 하면 바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오세영 시인이 라종주 사촌누이에게 전화해 종주야 뭐 먹고 싶은 게 없니? 사과 한 상자 보내줄까?”라고 물어볼 수 없는 이 지상의 비극이 이제는 끝나야 한다. 정전협정을 맺은 지 어언 72년이 흘러갔다. 오늘은 남인수의 노래 <거거라 삼팔선>을 들어보련다.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련만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리길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탄한다,
 

  아 꽃 필 때나 오시려느냐 아 눈 올 때나 오시려느냐 보따리 등에 메고 넘던 고갯길 산새도 너와 함께 울고 넘었지 자유여 너를 위해 자유여 너를 위해 이 목숨을 바친다

 

 [오세영 시인]

 

  1942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해주다. 서울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 국문학과에서 정년퇴임을 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캠퍼스(1995~1996)에서 한국현대문학을 강의했다.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한국예술원 회원이다.

 

  1968년 《현대문학》에 박목월 추천으로 등단했다. 초기에 언어의 예술성에 철학을 접목시키는 방법론적 문제로 고민하다 동양사상, 특히 불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후 불교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사물의 존재론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현대문명 속에서 좌절감을 느끼는 인간의 정서를 서정적으로 형상화했다. 2005년 열세 번째 시집 『시간의 쪽배』를 낸 시인은 절제와 균형을 갖춘 중용의 미를 추구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삶의 체취가 느껴지는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근년에는 시의 진폭을 더욱 넓혀 세계의 오지를 여행하면서 인간 문명의 역사와 국가들의 흥망성쇠를 탐색, 그를 입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만해대상, 한국시인협회상, 김삿갓문학상, 공초문학상, 녹원문학상, 편운상, 불교문학상, 고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최근에 『대한민국예술원회원 구술총서』를 펴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나무 앞에서의 기도』 『사람 사막』 등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KAN 편집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