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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탐구] 정혜미 작가, 할머니의 색채 기억을 품고 러시아로…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넘다

임만택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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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공화국 국립미술관 공식 초청 ‘러시아–한국 우호전’ 참가… 《Boundary the After _연담》 연작 2점 선보여 삼베 장인의 색채 기억에서 출발해 청자의 비색과 현대 회화로 확장 물질과 환경, 통제와 우연 사이에서 피어나는 ‘경계의 미학’

한 폭의 그림에는 때로 한 사람의 삶이 담기고, 오랜 세월을 건너온 기억이 스며든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색채의 조합일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족의 손길과 어린 시절의 풍경, 잊히지 않는 시간의 흔적일 수 있다.

 

한국의 전통 도예를 기반으로 다양한 재료와 조형 언어를 탐구해 온 정혜미(JUNG HYEMI) 작가에게 색은 바로 그런 존재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은은한 백색과 맑은 청록빛은 단순한 시각적 표현을 넘어 세대를 이어온 기억이자 한국적 미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예술적 언어다.

정혜미 작가가 《Boundary the After _연담》 연작 앞에서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작품 1: 정혜미, 《Boundary the After _연담》 1, 60.6×60.6cm, Acrylic on canvas

정혜미 작가가 러시아 사하공화국(야쿠티아) 국립미술관의 공식 초청으로 개최되는 ‘러시아–한국 우호전’에 참가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대표 연작 《Boundary the After _연담》 2점을 선보인다.

 

러시아 현지 교류에 앞서 2026년 10월 7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 B1에서 국내 사전 전시가 진행된다. 이후 오는 22일부터 29일까지 러시아 사하공화국의 수도 야쿠츠크에서 현지 교류 일정이 이어질 예정이다.

 

할머니의 손끝에서 시작된 색의 기억

 

정혜미 작가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에 담긴 가족의 기억을 먼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작가의 할머니는 삼베 장인이었다. 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다듬고, 직물을 만들며 오랜 시간을 살아온 할머니의 손끝에는 한국 전통 공예가 지닌 고유한 색과 질감이 배어 있었다.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접했던 삼베의 색과 결, 재료의 촉감은 시간이 흐른 뒤 정혜미의 작업에서 중요한 조형적 기억으로 되살아났다.

 

작가는 그 기억을 단순히 과거의 추억으로 간직하지 않았다. 도자예술을 공부하며 발견한 한국 청자의 은은한 비색을 자신만의 색채 언어와 결합해 현대적인 화면으로 옮겨왔다.

 

그렇게 탄생한 작업이 《Boundary the After _연담》 연작이다.

 

정혜미 작가는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색에 대한 기억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제가 작업을 이어가는 하나의 감각이 되었습니다. 그 색을 현대적인 청자의 언어로 다시 바라보고 제 작업 안에서 새롭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그에게 전통은 과거의 형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일이 아니다. 세대를 거쳐 이어져 온 감각을 오늘의 언어로 새롭게 해석하고, 현재의 삶과 연결하는 창조적 과정이다.

 

서로 다른 색이 만나는 자리, 《Boundary the After _연담》

 

이번 전시에 출품하는 두 점의 작품은 단순하면서도 절제된 색면 구성이 특징이다.

정혜미, 《Boundary the After _연담》 2, 60.6×60.6cm, Acrylic on canvas, 2026

첫 번째 작품에서는 따뜻한 미색과 맑은 청록빛이 수평으로 만난다. 두 번째 작품에서는 색의 위치가 반전되면서 새로운 시각적 균형을 만들어낸다.

정혜미, 《Boundary the After _연담》 2, 60.6×60.6cm, Acrylic on canvas, 2026.정혜미, 《Boundary the After _연담》 2, 60.6×60.6cm, Acrylic on canvas, 2026.

화면은 두 개의 색면으로 나뉘지만, 그 경계가 반드시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서로 다른 색이 각자의 존재를 유지하면서 하나의 화면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관계를 보여준다.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색면의 표면에는 섬세한 질감이 살아 있다. 삼베의 결을 연상시키는 물성과 청자의 비색을 떠올리게 하는 색채는 한국적 미감의 현대적 변용이라는 작품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정혜미는 장식적인 형상을 최소화하는 대신 색과 표면, 화면의 구조를 통해 관람객이 작품을 천천히 바라보고 사유하도록 이끈다. 특히 색면의 위아래를 바꾸는 단순한 변화만으로도 작품은 서로 다른 정서와 공간감을 형성한다.

 

이는 작가가 오랫동안 탐구해 온 ‘경계’라는 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로 다른 두 색은 구분되지만 동시에 만난다. 경계가 있기에 각각의 존재가 분명해지고, 그 경계에서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Boundary the After _연담》이라는 제목 역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연꽃과 물이 만나는 풍경처럼 서로 다른 시간과 기억, 전통과 현대가 하나의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겹쳐지고 스며드는 과정을 표현한다.

 

경계는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자리

 

정혜미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경계’다.

 

일반적으로 경계는 서로 다른 존재를 구분하거나 분리하는 선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정혜미가 바라보는 경계는 단순히 나누는 역할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인간과 사물, 물질과 환경, 전통과 현대, 의도와 우연 사이에는 언제나 경계가 존재한다. 작가는 그 경계에서 발생하는 관계와 변화를 다양한 재료와 조형 방식으로 탐구한다. 그의 작업은 일상의 관찰과 경험에서 시작된다. 주변 사물과 환경을 바라보며 떠오른 질문들은 흙과 유약, 색과 표면, 형태와 공간이라는 조형적 언어로 전환된다.

 

도예에서는 흙의 성질과 유약의 변화, 불과 온도가 만들어내는 예측할 수 없는 결과에 주목한다. 회화에서는 색의 중첩과 표면의 질감, 화면을 구분하는 구조를 통해 관계의 의미를 탐색한다. 정혜미는 작가의 의도만으로 모든 결과를 결정하기보다 재료가 가진 고유한 성질과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연성을 작업의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인다.

 

통제와 우연이 만나는 순간, 물질과 환경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지점에서 새로운 조형적 가능성이 발생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지속해서 탐구해 온 ‘오차의 미학’과도 연결된다.

 

예상과 다른 결과를 실패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새로운 아름다움과 표현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정혜미 작가노트

 

정혜미는 도자를 기반으로 다양한 재료와 조형 방식을 탐구하며 인간과 사물, 물질과 환경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와 변화에 주목한다. 일상의 관찰과 경험에서 출발한 질문을 흙과 유약, 색과 표면, 형태와 공간의 언어로 풀어낸다.

특히 서로 다른 존재를 구분하면서도 만남과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경계’의 의미를 탐구한다. 물질의 고유한 성질과 작가의 의도, 통제와 우연 사이에서 발생하는 변화를 수용하며 새로운 조형적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관은 이번 《Boundary the After _연담》 연작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작품의 두 색면은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하나의 화면을 이루고, 경계를 유지하면서도 조화를 형성한다. 단순한 구성 속에서 관계와 변화의 본질을 탐색하는 정혜미의 조형적 사유를 읽을 수 있다.

 

흙에서 출발한 예술, 회화로 확장되다

 

정혜미 작가는 단국대학교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한국 전통 도자와 공예기법을 꾸준히 연구해 왔다. 강진도예학교의 청자장인양성교육을 비롯해 청화기법, 금박장식공예, 옻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교육을 이수했으며, 일본 아리타 청화기법을 배우는 등 동아시아 도자문화에 대한 이해도 넓혀 왔다.

 

도자예술은 흙이라는 자연의 재료를 다루는 작업이다. 그러나 흙이 작가의 손에서 형태를 갖추고, 유약과 불을 만나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기까지는 수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재료의 물성과 인간의 의도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관계를 발견했다.

 

그 경험은 이후 회화와 다양한 조형 실험으로 이어졌다.

 

캔버스 위에서 색과 색이 만나 만들어내는 경계, 표면에 남겨진 질감, 화면 안에서 발생하는 균형과 긴장 역시 도예에서 발견했던 관계의 원리와 맞닿아 있다. 매체가 달라졌다고 해서 작업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흙에서 출발한 물질에 대한 이해가 회화라는 새로운 표현 방식 속에서 더욱 확장된 것이다.

 

정혜미의 작품세계는 전통 도예의 기술적 계승에 머무르지 않고 재료와 환경, 인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한국적 색채, 러시아의 자연과 만나다

 

이번 ‘러시아–한국 우호전’은 한국과 러시아 예술가들이 작품을 매개로 서로의 문화적 정체성과 예술적 감성을 공유하는 국제 문화예술 교류의 장이다.

 

정혜미 작가에게 이번 전시는 오랜 시간 탐구해 온 한국적 색채와 조형적 사유를 새로운 문화권의 관람객들에게 소개하는 계기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청록빛은 한국 전통 청자의 비색에서 출발하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하늘이나 물, 자연의 풍경을 떠올리게 할 수 있다.

 

러시아 사하공화국의 광활한 자연과 혹독한 기후, 독특한 문화적 환경 속에서 한국의 전통적 색채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관심을 모은다.

 

대한민국 참여 작가들은 오는 10월 22일부터 29일까지 러시아 야쿠츠크를 방문해 작품 설치와 공식 개막식, 방송 인터뷰, 미술관 및 미술학교 방문, 현지 예술가와의 교류 프로그램 등에 참여할 예정이다.

 

특히 이번 국제전은 작가가 탐구해 온 ‘경계’라는 개념이 실제 문화예술 교류의 현장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역사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예술을 통해 만나고 이해하는 과정은 정혜미가 작품 안에서 끊임없이 질문해 온 관계의 형성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전통의 기억을 오늘의 감각으로 잇는 작가

정혜미 작가

정혜미는 국내외 전시와 공예문화 활동을 통해 꾸준히 자신의 작품세계를 발전시켜 왔다.

 

2013년 과천 갤러리 다선 기획 초대전 《touch, 터치다!》, 2014년 광주 금호갤러리 청년작가 전시공모 선정전 《그리고.. 흔적》 등을 개최했으며, 일본과 중국에서 열린 국제 교류전에도 참여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공식 기념품인 ‘VIP 청자·백자 머그컵 세트’를 제작했고, 대한민국 사발공모전에서 여러 차례 특선과 입선에 선정되는 등 전통 도예 분야에서도 성과를 쌓았다.

 

현재는 ‘문래도도’와 ‘아르테미스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창작과 공예교육, 전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작품은 양구백자박물관, 중국 도계천 갤러리, 단국대학교, 씨티은행 등에 소장돼 있다.

 

정혜미가 추구하는 예술의 방향은 분명하다.

 

전통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전통이 지닌 감각과 물질의 특성을 현대적인 조형 언어로 확장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인간과 사물, 재료와 환경, 의도와 우연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를 끊임없이 탐색한다.

 

이번 러시아 초청전은 이러한 작업세계가 국제적인 문화교류의 현장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삼베 장인이었던 할머니의 손끝에서 시작된 색의 기억은 한국 청자의 비색을 만나고, 현대 회화의 화면으로 옮겨져 이제 러시아의 미술관을 향한다.

 

서로 다른 두 색이 만나는 경계에서 새로운 조화가 탄생하듯, 서로 다른 문화와 예술이 만나는 자리에서도 새로운 관계와 이해가 시작될 수 있다.

 

정혜미의 《Boundary the After _연담》은 바로 그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그가 그려내는 것은 단순한 색의 경계가 아니다. 시간과 세대, 물질과 환경,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를 이어주는 관계의 풍경이다.

러시아 사하공화국 국립미술관 공식 초청 ‘러시아–한국 우호전’ 사전 전시 및 현지 교류 안내 포스터

전시 개요

국내 사전 전시

  • 전시명 : 러시아–한국 우호전 ―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 B1 오픈 기념

  • 기간 : 2026년 10월 7일 ~ 12일

  • 장소 :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 B1

  • 주소 :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34-1, 지하 1층

러시아 현지 교류

  • 행사명 : 러시아–한국 우호전

  • 초청기관 : 러시아 사하공화국 국립미술관

  • 현지 방문기간 : 2026년 10월 22일 ~ 29일

  • 지역 : 러시아 사하공화국 야쿠츠크

  • 참여작가 : 정혜미(JUNG HYEMI)

  • 출품작 : 《Boundary the After _연담》 연작 2점

  • 작품규격 : 각 60.6×60.6cm

  • 재료 : Acrylic on canvas

  • 제작연도 : 2026년

  • 문의 : [email protected]

    사진 및 자료 제공=정혜미 작가
    편집: 임만택 한국아트넷뉴스 대표

임만택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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