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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 신간 소개] 조광호 신부, 그림시집 『흐름 위에서』 출간 — 빛과 침묵의 언어로 기록한 영혼의 여정

류우강 기자
입력

강화도 인근 작은 섬, 동검도의 언덕 위에 자리한 7평 남짓한 성당. 이곳에서 사제이자 화가, 시인인 조광호 신부는 바다와 하늘, 갯벌과 노을을 바라보며 붓과 펜으로 “푸른 말씀”을 기록해왔다. 그 오랜 내면의 여정을 담아낸 첫 그림시집, 『흐름 위에서』가 출간되었다.

조광호 신부 시인의 그림시집  "흐름 위에서" 표지

빛과 색채, 언어가 만나는 자리

 

조광호 신부는 자신의 예술을 “보이지 않는 말씀을 조형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라 고백한다. 태초의 말씀(logos)이 빛과 형태, 색채로 스며드는 순간을 그는 ‘블루 로고스(Blue Logos)’라 부른다. 이번 시집은 그 푸른 흐름 속에서 잠시 영혼에 닿았다 사라져 간 빛의 떨림, 영원의 숨결을 붙들어 둔 기록이다.

 
  • 1부 ‘새벽 시편’에서는 갯골의 밀물과 썰물, 겨울 갯벌과 첫눈, 어머니와 유년의 기억, 출가의 결단을 짧고 서늘한 시어와 드로잉으로 담았다.  2부 ‘명상 시편’에서는  신앙과 수행, 죄와 양심, 종말과 자비, 사랑과 애도의 지점을 깊이 파고들며, 「수행자」, 「빛으로 지어진 사람」, 「종말시계」 등에서 시대의 어두움과 개인의 상처를 함께 응시한다.

 

‘흐름’은 단순한 자연의 변화가 아니라, 만물의 생멸 속에서도 변치 않는 거대한 침묵의 강을 의미한다.

 

시·서·화의 삼위일체

 

『흐름 위에서』는 단순한 시집도, 화집도 아니다. 시와 드로잉, 글씨가 서로를 비추며 순환하는 삼위일체의 예술이다. 독자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동검도의 새벽과 황혼, 바람과 빛이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책 속으로

 

섬이 원래 있었던 것도

섬이 사라진 것도 아님에도

흘러들고

흘러나는

환영 같은 시간의 그림자 속


— 「창가에 기대어」 중에서

 


그 어느 들불 같은 사랑이 있어

쓰디쓴 염기를 견뎌내고

스치는 햇살과 지나는 바람 속에

잊힌 이름 이름들 잎새마다 몰래 매달고

뜨거운 속울음 삭혀낸 그 빛


— 「나문재 노을」 중에서

 

 

언제부턴가 자기 이름을 잃어버린

슬픈 계절의 등을 두들기며

찬물 한 사발 드릴까, 그래도 안 되면

코를 쥐고 설탕물 한 사발을 올려 드릴까.


— 「종말시계」 중에서

 

첫눈이 오면

눈사람 하나를 만들어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만발한 우리들의 죄가

흰 꽃잎으로 떨어져 쌓이는

엄동의 빈터에


— 「선물」 중에서


  • 문학평론가 이숭원은  “조광호 신부의 시문은 영혼의 고백이자 신앙의 축원이다. 침묵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한다.” 라고 평한다.  
  •  
  • 이승하 시인은 “난해함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언어 세공법을 고안해 촌철살인과 천의무봉을 보여준다.”고 그의 시편을 평가한다. 
 

『흐름 위에서』는 삶의 속도가 버겁고 마음이 메마를 때, 책상 위에 펼쳐둘 수 있는 한 폭의 푸른 창이다. 그 창을 통해 우리는 동검도의 새벽과 황혼, 그리고 우리 안의 깊은 흐름을 함께 바라보게 된다.

 

이 책은 결국, 한 사제가 붓과 펜으로 써 내려간 영혼의 기록이며, 빛과 침묵의 언어로 엮은 푸른 성화다.
 

 신부는 1947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나 1977년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한 후, 1979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독일 뉘른베르크 대학과 같은 대학원에서 그림 공부를 하여 198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내외에서 20여 차례의 개인전을 가진 바 있으며, 여러 단체전에도 참여했다. 우리나라 작가로는 드물게 재료와 장르를 넘나들며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메시지를 회화, 판화, 이콘화, 유리화, 조각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해왔다. 

대표 작품으로는 부산 남천성당 유리화, 서울 당산철교 외벽의 벽화, 서소문 현양탑 등이 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종교미술학부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임한 이후 동검도의 작은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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