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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 김미인의 "향수"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시 해설 ] 김미인의 "향수"

이승하 시인
입력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42] 

향수

 

김미인

 

자욱한 안개가 앞을 가렸어도

깊이 스며들었다

비바람이 억세게 몰아쳤어도

깊이 스며들었다

세찬 눈보라가 몰아쳤어도

깊이 스며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에 버둥거렸어도

깊이 스며들었다

달빛에 웅크린 몸을 숨겼어도

깊이 스며들었다

눈부신 태양에 색이 바랬어도

깊이 스며들었다

코스모스 한껏 흔들리는 날

꼭 잡은 두 손에서도

깊이 스며들었다 
 

 "코스모스 한껏 흔들리는 날 꼭 잡은 두 손에서도 깊이 스며들었다"  향수_김미인 [ 이미지: 류우강 기자]  

향수

 

향수로 염을 한다

죽음의 향기로 물들어가는 시취

매 순간마다 알 수 없는

향수 냄새가 났다

눈 코 입으로 들락날락하던

숨구멍을 막고 구석구석 쌓인

오물을 닦아낸다

하얀 분가루와 붉은 볼 터치

입술엔 빨간 앵두색을

발랐다 까만 머리칼은

동백 기름칠로

이마 뒤로 쓸어내고

우는 듯, 웃는 듯

아롱거리는 분신들

풀풀 날렸던 삶의 향기는

마디마디 묶인 자국으로

소멸되어 간다

영원히 살 것이라고

손가락 마디에 분홍빛

향내가 배어났다

온몸을 도포하듯

짙은 향수가 뿌려진다

이생에서의 떼어낸 상처들

펼쳐진 종이에 몸을 감싼다

못내 아쉬웠던 삶이었을까

힘들게 다문

입술에 향기가 촉촉하다

 

―『립스틱』(은하태양, 2025)

 
 

 [해설]

 

 생자에게도 사자에게도 향수를 

 

 (‘하루에 시 한 편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글을 쓰는데 오늘은 같은 제목의 시 2편을 다루겠습니다.)

 

  향수(香水)라는 것이 있다. 화장품의 하나로, 향료를 알코올 따위에 풀어 만든 액체이다. 냄새가 좋아서 옷에 조금만 뿌려도 자기도 옆 사람도 기분이 상쾌해진다. 염습할 때도 향수를 쓴다. 시신을 깨끗하게 닦기 위해 얼굴ㆍ손등ㆍ발등 부분에 솜으로 찍어 바르는, 향나무를 담근 물이다. 일종의 소독제로서 향나무를 이용하니 냄새가 좋다.

 

  김미인의 첫 시집 『립스틱』에는 온갖 종류의 치장 물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시인의 이름도 그렇고 전직이 모델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마스카라」「스킨」「마스크 팩」「매니큐어」「아이새도」「틴톤 꽃 립스틱」「파운데이션」「아이라인」「속눈썹」「벚꽃 메이크업」 외에 「화장」「화장품」「화장품 여행」「화장품 이야기」「나는 화장품이다」「화장대의 얼굴」「화장품 마을」「화장하는 여자」「스모키 화장」 등의 시로 수놓인 시집이라 참 특이하다. 화장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시의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화장을 매일 하는 이라면 너무나 공감 가는 내용일 것이다.

 

  앞의 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향수의 기능을 말하고 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향수라는 액체가 있다. 사람의 체취가 그렇게 강할 수도 있지만 대개의 향수는 우리 코로 들어오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 시는 끝에 가서 반전이 이뤄진다. 향수가 손에 스며들 리 없는데 사랑하는 사이라면 꼭 잡은 두 손에서도 깊이 스며들 수 있는 것이 향수라고 하니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다.

 

  두 번째 향수는 사자를 염할 때 쓰는 향수를 가리킨다. 시체에서 좋은 냄새가 날 리 없다. 생자가 사자에게 예를 갖추어 염할 때 향수는 큰 역할을 한다. 시는 염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전개되는데, 이윽고 “풀풀 날렸던 삶의 향기는/마디마디 묶인 자국으로/소멸되어 간다.” 그리하여 저승으로 잘 가라는 염원을 담아 솜으로 향수를 적셔 닦으니 “영원히 살 것이라고/손가락 마디에 분홍빛/향내”가 배어난다. 그리고 마침내 온몸을 도포(塗布)하듯이 짙은 향수가 뿌려진다. 힘들게 다문 입술에도 향기가 촉촉하니 이제 염이 끝났다. 향수가 제 역할을 다했다. 향수는 산 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필요한 물이다.    

 

  [김미인 시인]

 

서울에서 태어나 한양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일대 유아교육학과와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시집 『립스틱』을 이제 막 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나무 앞에서의 기도』 『사람 사막』 등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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