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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의 수필 향기] 타슈켄트에서의 눈물 - 이권현
문학/출판/인문

[김영희의 수필 향기] 타슈켄트에서의 눈물 - 이권현

수필가 김영희 기자
입력

   KOICA 해외 자원봉사단으로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에 도착한 지도 벌써 2주를 넘기고 있다. 언어와 문학의 특성화 대학 '타슈켄트 나보이대학'에서 현지어를 배우고 있기에 대학 내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타슈켄트의 아침은 빠르기도 하다. 새벽이라고 말할 수 있는 4시이지만 벌써 밖은 환하게 밝아와 더는 침대에서 게으름을 필수가 없게 한다. 

  이른 아침부터 나무 밑동에 정성스레 물을 주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하기야 한낮 기온이 40도를 출렁거리고 있으니, 이른 아침이야말로 일하기엔 적당한 시간일 것이다. 그런데 교정을 둘러싼 공원에는 눈에 띄게 무궁화꽃 나무가 많다. 분명 우즈베키스탄의 국화는 목화인데 목화는 보이지 않고, 무궁화가 공원을 장악하고 있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교명에 쓰인 'Navoiyi'란 사람의 동상 좌우로 둥글고 넓게 펼쳐진 교정엔 무궁화가 예쁜 색조로 방긋 웃음 지으며 나를 반긴다...... 

 

 물을 주는 사람에게 다가가 '이 꽃 이름이 무엇인 줄 아느냐'는 나의 질문에 무궁화(sharon arirgul) 라는 이름과 함께 묻지도 않은 '한국 나무'라고 답한다. 대답과 함께 나를 말끔히 쳐다보더니만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답하자, 화단 일을 하던 더럽혀진 손으로 다짜고짜 내 손을 덥석 움켜쥐며 반갑다는 인사를 건넨다. 그는 고려인 3세로 한국어를 못해도 움켜쥔 손에서 동포의 강한 감정이 느껴져 왔다. 나도 이곳에서 우즈벡어를 배우는 왕초보로 일상적인 대화조차 어려워서 영어로 이야기 나눌 수 있느냐고 했더니 오히려 날 보고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지 되묻는다. 참 낭패였다. AI형 스마트폰만 있었더라면 고려인 3세라는 사람과의 대화가 이렇게까지 아쉽지는 않았을텐데 하는 자책과 함께, 앞으로 아내의 말은 독약을 감초탕이라 할지라도 믿기로 했다. 코이카에서 만들어준 명함을 건네주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뜨르륵 뜨르륵 전화벨이 울렸다...... 우즈벡어로 "누구세요, 여기는 000입니다." 말하자 다시 우즈벡어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기기 저편에서 들렸다. 그리고 앳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영어 인사를 전해왔다. 
 

  아침에 만났던 고려인 3세의 딸이란다. 그러니 고려인 4세가 되는 것이다. 역시 한국어는 못해도 영어는 막힘없이 구사했다. 대화는 매끄럽게 진행됐고 중간중간 부모 마음을 통역해 전해주었다. 
 

  통화를 마치고 많은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말과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조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면서도, 뭐가 그렇게 소통이 어려운 사회가 됐는지 못내 씁쓸하기만 했다. 그들은 3대를 이어오고 있지만, 조국을 그리워할 뿐 다가갈 수 없는 조국 대신 무궁화를 정성 들여 가꾸고 있었다. 소통하고 싶어도 마음을 주고 싶어도, 언어가 달라 표현이 어려웠지만 어떻게라도 소통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동포, 같은 민족 고려인들의 참모습을 보면서 울컥 콧잔등이 시려왔다. 

 

  고려인 3세인 그는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 시대에 대해서 이야길 들었다며 나에게 이야기를 전할 때는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나라 잃은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려인들은 연해주에서 6천 Km가 넘는 먼 거리를 바람막이도 없는 화물칸 기차에 태워져, 시베리아를 거쳐 미개척지 우즈베키스탄(당시는 소련연방의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에 쓰레기를 버리듯 버려진 것이다. 동토의 땅 중앙아시아에서 그들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땅굴을 파고 짐승처럼 견뎌냈다. 그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삶을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 험난한 인생을 살아온 1세대 고려인의 이야기를 어찌 감히 내가 필설로 대신하여 설명할 수 있는 일일까. 

 

  정치꾼들이 한 번이라도 이들과 대화해 볼 것을 주문하고 싶다. 나라 잃은 설움은 그 어떤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는 뼈를 깎아내는 아픔이었다는 당시 고려인들의 삶의 이야기. 그리고 애잔하게 들려주던 '아리랑'에서 나도 모르게 눈이 흐려옴을 느꼈다. 

 

  권력을 탐하는 자들에게 묻고 싶다. 6.25 동란으로 황폐화한 조국에서 헐벗고 굶주림을 겪어야 했던 민초民草들의 삶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던가? 위기에 처한 국가를 피와 땀으로 지켜온 주체는 항상 선량한 민초들이 아니었던가? 

 

  조국 잃은 고려인의 후손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무궁화에 물을 주며 애정으로 가꿔가는 이 마음이야말로 피끓는 애국이 아니던가. 조국의 언어는 잃었어도 조국을 온 몸으로 사랑하는 고려인, 대화 중간에 불러주던 '고려인의 아리랑'은 지금도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조국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를 심장으로 느끼게 하는 타슈켄트의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 이권현의 '타슈켄트에서의 눈물' 중에서 

 [수필 읽기]

 

  KOICA 해외 자원봉사단으로 갔던 우즈베키스탄에서 겪었던 이야기이다.

  먼 이국 땅에서 만난 '무궁화'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작가는, 무궁화 나무에 물을 주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꽃의 이름을 아느냐'는 질문을 한다. 고려인 3세라는 그는, 할아버지 때부터 이국 땅에서 자리 잡고 살지만,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궁화를 정성껏 가꾸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고려인'은 소련 붕괴 후의 구 소련 지역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의미한다. 현지의 고려인들은 우리말로 '고려 사람'이라는 단어를 훨씬 더 많이 쓴다고 한다. 

 

  고려인들은 주로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등 구소련 국가들의 국적을 취득하여 해당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라 없이 지낸 150년, 고려인들. 출생신고도 사망신고도 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존재하지만 없는 사람으로 취급 받는 무국적자가 있다. 국내에 살고 있지만 국가에 소속되지 못해서 학교에 갈 수도 일자리도 구할 수 없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그들을 위한 정책들이 잘 실행되기를 바란다.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연해주에서 살던 한인들은 독립운동을 벌여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1919년에는 3.1운동에 호응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펼쳐나갔다. 만세운동 직후, 연해주 한인들은 대한 국민 의회를 결성,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1937년 8월 21일, 스탈린이 '고려인 강제 이주령'을 승인한 후 수많은 한인들이 무기력하게 기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 9월에 이루어진 이주는 11월에 모두 종료되었고 열악한 환경 때문에 수백 명이 넘는 한인들이 기차 안에서 죽어나갔다고 한다. 

  1923년 고려인의 숫자는 10만을 넘었고, 1937년에는 17만에 이른다. 고려인 학교가 370곳, 신문도 7개나 있었다고 한다. 

 

  애국가에도 나오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노래에서처럼 무궁화나무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였다.  

  연분홍빛의 꽃잎이 아름다운 무궁화는 끊임없이 피고 지면서도 한 나무에서 여러 번 꽃을 피우는 특성이 있어, 한결같은 마음, 변치 않는 사랑을 상징한다.  

 

  무궁화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에게 사랑 받아 왔으며, 고조선 이전부터 하늘나라의 꽃으로 귀하게 여겨졌고, 신라는 스스로를 '무궁화 나라'(근화향)라고 부르기도 했다.

  무궁화는 7월 초순부터 10월 중순까지 매일 꽃이 피고, 보통 한 그루에 2천~3천 여 송이가 핀다고 한다. 또한 옮겨 심거나 꺾꽂이를 해도 잘 자라고 공해에도 강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 민족의 근면과 끈기를 잘 나타내 준다. 우리 나라의 영원한 발전과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으나 삼천리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무궁화는 요즘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궁화를 다시 보고 싶다. 무궁화 공원도 많이 만들고, 무궁화 심기를 장려하여 길가에 많이 심어서 사라진 무궁화를 거리 곳곳에서 보고 싶다. 

  

  "무궁화가 가득한 아름다운 삼천리 강산~!

김영희  수필가, 코리아아트뉴스 칼럼니스트, 문학전문 기자  
 

         충남 공주에서 태어남 
         수필가, 서예가, 캘리그라피 작가, 시서화 ,웃음행복코치,

         레크리에이션지도자, 명상가 요가생활체조

         <수필과비평> 수필 신인상 수상
         신협-여성조선  '내 인생의 어부바' 공모전 수상
         한용운문학상 수필 중견부문 수상
         한글서예 공모전 입선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필과비평 회원

  

 

수필가 김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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