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호의 時부렁調부렁 36】 포기 열전(列傳)
포기 열전(列傳)
김선호
몇 놈 잡아들여 족쳐보니 눈물겹네
빈둥대다 게임 하다 그게 일상인 방귀신한테 취업은 언제 하느냐 종주먹을 들이대니 이력서 쓰다 지쳐서 정나미가 떨어졌다네 마흔 줄 아들 잡고 장가 언제 갈 거냐 하니 백수한테 누가 오며 결혼하면 어디 살며 아무리 생각해봐도 포기가 답이라 하네 시집간 지 십 년인데 애는 언제 낳느냐 하니 애 하나 키우는 데 얼마 드는지 아느냐며 엄마가 되고 싶은 맘 교육비 땜에 접었다 하네 철 지난 배추한테 왜 아직도 여기냐 하니 날씨 탓에 포기가 안 차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그 무슨 염치가 있어 꼽사릴 끼느냐 하네 등산길에 낙엽 차며 왜 떨어져 뒹구냐 하니 솔잎처럼 어리광 떨며 달라붙고 싶지만 내 욕심 하나 버리면 어미가 사니 어쩌냐 하네 항소 포기 진짜 이유가 뭐냐고 들끓는데 이게 옳다 저게 그르다 싸움질이 한창인데 눈 감고 귀 막은 건지 답변을 포기한 건지…
화장도 지운 들국은 송이마다 향을 빚네

삼포세대니, 오포세대니 하며 신조어가 넘쳐난다. 칠포, 구포 하다가 급기야는 N포까지 만들어졌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젊은이들을 일컬어 삼포세대라 한다. ‘저 먹을 건 갖고 태어난다’는 속담은 박물관에 안치된 지 오래다.
추석 이후 잦은 비로 김장 작황이 좋지 않았다. 포기를 벌다 말고 나뒹구는 배추가 볼썽사납다. 상품성이 떨어지니 도매상이 외면한 결과다. 오른 배춧값에도 불구하고 정부 개입에 힘입은 김장비용이 예년보다 저렴하다는 발표가 있지만, 김장 행렬에 끼지 못한 낙오에는 비애가 감돈다. 떨어진 낙엽도 안쓰럽긴 마찬가지다. 잎새를 떨궈야만 겨울을 나는, 활엽수들의 불가피한 운명이라니 어쩌랴. 그 장엄한 포기를 경외한다.
대장동 항소 포기를 놓고 정치권이 시끄럽다. 현란한 수사와 아전인수식 논리가 눈을 가린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도 힘들지만, 끊임없이 치고받는 광경을 지켜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만큼 봤으면 면역도 생겼을 법한데, 지끈거리는 머리엔 채널 돌리는 처방이 고작이라니.
홧김에 창문 열다 명의를 만났다. 핼쑥해진 얼굴을 애면글면 내민 들국화, 황혼길인 그들은 화장마저 포기했는지 점점 미색을 잃어간다. 그런데도 창틈으로 은은한 향을 불어넣다니! 생의 마지막까지 소임 다하겠다는 그 기백이 장엄하다. 시끄럽던 머릿속을 금세 맑히는 들국화, 포기 열전의 맨 앞자리에 놔야겠다.
김선호 시인, 코리아아트뉴스 문학전문기자

조선일보 신춘문예(1996)에 당선하여 시조를 쓰고 있다. 시조를 알면서 우리 문화의 매력에 빠져 판소리도 공부하는 중이다. 직장에서 <우리 문화 사랑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으밀아밀』 『자유를 인수분해하다』등 다섯 권의 시조집을 냈다. 코리아아트뉴스 문학전문기자로 활동하며, 충청북도 지역 문화예술 분야를 맡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