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79] 권숙월의 "영심이 꽃밭"
영심이 꽃밭
권숙월
영심이 홀로 숨을 거두자 싸늘한 바닥이 받아주었다 장모님 댁에서 우리 집에 온 지 십몇 년 만이다 목줄 갈아준 적 없는 순한 영심이, 이틀 동안 먹지 않고 땅을 파더니 숨을 거두고 말았다 볼 때마다 쓰다듬어 달라고 보채더니 다 싫다는 듯 꼼짝 않고 누워 있다 뒷산 기슭에 묻어주고 집에 와 삽을 놓자 울음을 터트리는 아내, 오래 산 거라며 눈물을 감춘다 며칠 뒤 영심이 집 주변을 정리하자 꽃밭 하나 생겼다 덩치에 걸맞은 작은 집과 먹을 것 담아두던 통 깨끗이 닦아 같이 두었다 내년이면 새 꽃밭에서 코스모스가 대신 반겨주며 꼬리 흔드는 모습까지 떠오르게 하겠지
—『따뜻한 그늘』(황금알, 2025)
[해설]
많은 기쁨을 안겨준 영심이
개[犬]가 사람과 언제부터 친해졌는지 자료를 찾아보았다. 고고학적ㆍ유전학적 증거에 따르면 개의 가축화는 3만〜4만 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됐다는 주장이 많으며, 일부 학자는 1만5천 년 전 농경사회 시작과 함께 본격화되었다고 본다. 애완견에서 반려견으로 격상된 개라는 존재는 참 경이롭다. 사람보다 더 살갑고 사람보다 더 믿음직스럽고 사람보다 더 사랑스럽다. 가장이 녹초가 되어 귀가했을 때, 아내와 자식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데 강아지는 반갑다고 폴짝폴짝 뛰며 난리법석이다. 그 행동 하나만으로도 감동하게 된다. 고맙다, 너밖에 없구나.
권숙월 시인은 장모님 댁에서 가져온 개 영심이를 십몇 년 동안 키웠나 보다. 그런데 이틀 동안 먹지 않고 땅을 파더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리 오래 괴로워하지 않고 갔으니 다행이다. 요즘은 뒷산 기슭에 개의 시체를 묻으면 불법이라고 하는데 일일이 장사를 지내기도 그렇다. 자연으로 돌아가 식물의 거름이 되었다. 영심이가 있던 개집 주변을 정리하자 꽃밭 하나 생겼다고 하니 고녀석 꽃밭을 남기고 간 셈이다. 사람보다 낫다. 타인에게 해코지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데 개는 주인에게 충직하다. 눈물겨울 정도로 성심성의껏 따른다.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에 영심이가 꼬리 흔드는 모습을 오버랩시키면서 시는 끝난다. 화룡점정이다.
아들녀석이 아빠를 닮아 고등학교를 때려치우더니(나는 퇴학당했는데 그래도 아들은 자퇴하였다) 동네 동물병원에 가서 요크셔테리어 강아지를 한 마리 덜컥 사왔다. 2012년 3월 말이었다. 가수 랍티미스트(1985년생, 본명 이혁기)를 좋아해 이름을 ‘랍티’라고 붙였다. 10년을 건강하게 살았고 3년을 아파해 일곱 번인가 여덟 번인가 입원하였다. 동물병원 의사가 매번 살려냈는데 올해 1월 7일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권숙월 시인의 영심이를 잃고 애통해하는 심정으로 쓴 시를 읽고 랍티 생각이 나서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13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가장 친하게 지낸 벗을 잃었기 때문이다.

[권숙월 시인]
1945년 김천시 감문면에서 출생. 1979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 한국문인협회 김천지부장, 한국문인협회 경상북도지회장 역임. 김천문화원과 백수문학관에서 시 창작 강의. 새김천신문 편집국장. 시집 『동네북』『예수님은 나귀 타고』『무슨 할 말이 저리도 많아…』『젖은 잎은 소리가 없다』『왜 나무는 서 있기만 하는가』『이미지 변신』『그의 마음속으로』『하늘은 참 좋겠다』『옷고름 푼 복숭아나무』『하늘 입』『가둔 말』『새로 읽은 달』『민들레 방점』『금빛 웃음』『오래 가까운 사이』 발간. 시문학상, 매계문학상, 한국시학상, 경북예술상, 경상북도문화상, 김천시문화상 등 수상.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