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음악

[이 한장의 음반] 54, 눈으로 듣고, 귀로 보는 라산 로랜드 커크의 세계

임만택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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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스와프 자고르스키의 네 장의 커버에 담긴 ‘한 사람의 오케스트라’ 두세 대의 관악기를 동시에 불며 자신만의 사운드를 구축한 라산 로랜드 커크

음반은 음악을 담는 그릇이지만, 때로는 한 장의 재킷이 음악보다 먼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아직 턴테이블에 음반을 올리지 않았는데도 표지의 그림만으로 그 음악이 얼마나 기이하고 자유로우며 독창적인지를 상상하게 만드는 음반들이 있다.

 

이번 ‘눈으로 즐기며 듣는 이 한장의 음반’의 주인공은 바로 그런 두 예술가다.  

 

폴란드 출신의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스타니스와프 자고르스키(Stanislaw Zagorski, 1933~2025), 그리고 두세 대의 관악기를 동시에 연주하는 독보적인 방식으로 재즈사에 강렬한 흔적을 남긴 미국의 멀티 악기 연주자 라산 로랜드 커크(Rahsaan Roland Kirk, 1935~1977)다.

라산 로랜드 커크(Rahsaan Roland Kirk)

두 사람의 만남은 단순히 ‘음악가와 커버 디자이너’의 관계를 넘어선다. 자고르스키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커크의 음악을 듣는 듯하고, 커크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자고르스키가 만들어낸 초현실적인 이미지가 눈앞에 떠오른다.

 

음악보다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커버

 

스타니스와프 자고르스키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나 1957년 바르샤바 미술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바르샤바에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경력을 쌓은 그는 1963년 파리를 거쳐 미국 무대에 진출했고, 뉴욕에서 열린 전시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포스터와 드로잉, 모노타입을 비롯해 책, 잡지, 광고, 기업 브랜딩과 음반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활동 영역도 폭넓었다.

작고하기 전 스타니스와프 자고르스키(Stanislaw Zagorski) 

그의 작업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시각적 상상력’이다. 단순히 음악가의 얼굴을 멋있게 배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음악가의 개성과 연주 스타일, 때로는 음악 자체의 구조를 하나의 이미지로 번역해 냈다.

 

자고르스키는 미국 그래픽 아트계에서도 활동하며 여러 창작상을 받았고, 뉴욕 공영 라디오의 초기 디자인 작업에도 참여했다. 그의 실험적인 문자 구성과 음파를 연상시키는 조형 방식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선구적인 시도였다. 그는 기업 엠블럼과 CI, 로고 등 현대적 브랜딩의 개념이 정립되어 가던 시기에 활발하게 활동한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그의 그림과 디자인은 수많은 음반 커버에 사용됐다. 음악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조차 커버 이미지만은 기억할 정도로 강렬했다. 시사잡지 『TIME』의 표지도 여러 차례 작업했으며, 오랫동안 미국 그래픽 디자인계에서 자신만의 시각적 언어를 구축했다. 그는 2025년 8월 27일 뉴욕에서 생을 마쳤고, 뉴욕 우드스탁의 예술가 묘지에 안장됐다.

 

머릿속에 뒤엉킨 관악기들

 

이번에 소개하는 자고르스키의 라산 로랜드 커크 관련 음반 커버 가운데 특히 강렬한 작품은 1975년 앨범 『The Case Of The 3 Sided Dream In Audio Color』다.

 

앨범 커버에는 한 사람의 머리 안에서 여러 관악기가 서로 뒤엉킨 듯한 모습이 등장한다. 그것은 기괴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동시에 라산 로랜드 커크라는 음악가를 놀랄 만큼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산 로랜드 커크(Rahsaan Roland Kirk) 

실제로 커크는 무대에서 두세 대의 관악기를 동시에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자고르스키는 그런 커크의 독특한 연주를 ‘머릿속에 여러 대의 악기와 악보가 동시에 뒤엉켜 있는 음악가’처럼 표현했다. 시각적 위트와 음악적 특징이 하나의 이미지에서 절묘하게 만나는 순간이다.

 

앨범 제목 역시 범상치 않다. ‘세 면을 가진 꿈’이라는 표현부터 통상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난다. 커버 속 인물의 머리를 대신한 관악기 덩어리는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목소리를 동시에 내는 듯한 커크의 음악을 그대로 형상화한다. 음악을 아직 듣지 않았는데도 그가 어떤 연주자였는지 어느 정도 짐작하게 만드는 커버다.

 

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여러 개의 목소리

 

라산 로랜드 커크는 색소폰과 플루트를 비롯한 여러 관악기를 다룬 미국의 재즈 멀티 악기 연주자였다. 특히 여러 악기를 동시에 입에 물고 연주하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를 단순히 ‘여러 악기를 동시에 부는 기인’으로만 바라본다면 그의 음악 세계를 지나치게 좁게 보는 것이다.

 

그의 무대에는 폭발적인 에너지가 있었다. 즉흥 연주와 유머, 관객을 향한 재치 있는 농담, 사회와 정치에 대한 비판이 한데 어우러졌다. 여러 악기를 한꺼번에 연주하는 모습은 시각적으로도 강렬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묘기를 넘어 자신만의 사운드를 만들기 위한 음악적 방법이었다는 점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커크가 어린 시절 시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는 두 살 무렵 시력을 잃었고 오하이오 주립 맹인학교에서 공부했다. 15세 무렵에는 보이드 무어 밴드와 함께 주말마다 리듬 앤 블루스를 연주하며 순회공연에 나설 정도로 일찍부터 음악 현장에 뛰어들었다.

 

색소폰 연주자 행크 크로퍼가 어린 커크의 연주를 처음 접했을 당시를 회상한 대목도 흥미롭다. 어린 나이에 이미 두 개의 관악기를 동시에 연주하며 무대를 뒤흔들 만큼 강렬한 개성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남들과 다른 방식’이 그의 음악적 정체성이었던 셈이다.

 

신체의 한계를 다시 음악으로 넘다

 

커크의 삶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시기는 1975년 이후다.

 

그는 1975년 큰 뇌졸중을 겪으며 신체 한쪽이 부분적으로 마비됐다. 많은 연주자에게 이는 음악 활동의 중단을 의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커크는 한 팔로 연주할 수 있도록 자신의 악기를 개조했다.

 

그리고 다시 무대에 섰다.

 

런던의 로니 스콧 재즈 클럽에서는 한 팔로 두 개의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고, 이후에도 국제 투어와 녹음, 방송 출연을 계속했다. 커크에게 악기는 주어진 조건 안에서 연주해야 하는 고정된 물건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이 달라지면 악기 역시 그 몸에 맞게 다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삶을 떠올리면 ‘연주한다’는 말의 의미도 달리 들린다. 커크는 단순히 악기를 연주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와 맞서면서 새로운 소리를 찾아갔다.

 

그는 1977년 12월 5일, 인디애나대학교 학생회관에서 공연한 다음 날 두 번째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청자들을 만났고, 독특한 연주 방식과 사운드는 미국 재즈 역사에서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 남았다.

 

네 장의 커버, 네 개의 라산 로랜드 커크

 

자고르스키가 작업한 라산 로랜드 커크 관련 네 장의 음반 커버가 함께 소개힌다.

라산 로랜드 커크(Rahsaan Roland Kirk) , 1975년 앨범  The Case Of The 3Sided

첫 번째는 1975년 『The Case Of The 3 Sided Dream In Audio Color』다.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여러 관악기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커크의 다중적인 사운드를 가장 직접적이고도 상징적으로 시각화한 작품이다. 자료에서도 이 커버를 자고르스키의 대표적인 커크 앨범 디자인으로 설명한다.

라산 로랜드 커크(Rahsaan Roland Kirk), 1976년 앨범 Other Folks’ MusicDream In Audio Color

두 번째는 1976년 『Other Folks’ Music』이다. 악보처럼 보이는 사각형의 구조물을 짊어지고 이동하는 인물들 사이에서 커크가 악기를 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음악가와 악보, 거리와 군중이 뒤섞인 장면은 마치 음악이 도시 속을 행진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자료 4페이지에는 이 두 앨범의 커버가 나란히 실려 있어 자고르스키가 같은 음악가를 얼마나 다른 시각적 언어로 풀어냈는지 비교해 볼 수 있다.

라산 로랜드 커크(Rahsaan Roland Kirk), 1978년 앨범 Boogie-Woogie String라산 로랜드 커크(Rahsaan Roland Kirk), 1978년 앨범 Boogie-Woogie String라산 로랜드 커크(Rahsaan Roland Kirk), 1978년 앨범 Boogie-Woogie String라산 로랜드 커크(Rahsaan Roland Kirk), 1978년 앨범 Boogie-Woogie String

세 번째는 1978년 『Boogie-Woogie String Along For Real』이다. 거대한 악기 케이스를 든 커크가 도시의 풍경 속을 걷고 있다. 인물은 현실적인 공간에 존재하지만 크기와 비례에는 묘한 낯섦이 있다. 커크라는 음악가가 도시 풍경 자체보다 더 커 보이는 이미지다.

라산 로랜드 커크(Rahsaan Roland Kirk), 1990년 앨범 The Man Who Cried FireAlong For Real 

네 번째는 1990년 『The Man Who Cried Fire』다. 커크를 마치 하나의 기념비나 조각상처럼 묘사하면서도, 악기 끝에서는 불꽃이 피어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음악가가 여전히 뜨거운 소리를 내뿜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자료 5페이지에는 두 음반의 커버가 나란히 배치돼 있다.

 

네 장의 그림은 같은 음악가를 다루지만 어느 하나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관악기로 가득 찬 머리, 음악 속을 걸어가는 인물, 거대한 악기 케이스를 들고 도시를 가로지르는 음악가, 그리고 불꽃을 토해내는 연주자의 형상.

 

그 모두가 ‘라산 로랜드 커크’다.

 

눈으로 먼저 듣는 재즈

 

좋은 앨범 커버는 음악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음악을 상상하게 만든다.

 

자고르스키의 라산 로랜드 커크 음반들은 그 점에서 특별하다. 그는 커크가 연주한 음 하나하나를 그림으로 옮기려 하지 않았다. 대신 ‘이 음악가는 어떤 사람인가’, ‘그의 머릿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소리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가’, ‘그 음악을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에 유머와 과장, 초현실적인 상상력으로 답한다.

 

한편 커크 역시 우리가 악기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었다. 색소폰은 한 번에 한 대만 불어야 한다는 관습, 몸에 장애가 생기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연주할 수 없다는 한계, 재즈 공연은 일정한 형식을 따라야 한다는 규칙을 그는 계속해서 넘어섰다.

 

그에게 두세 대의 관악기를 동시에 부는 행위는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었다. 하나의 몸에서 여러 개의 목소리를 동시에 만들어내려는 음악적 상상력이었다. 그래서 자고르스키가 그린, 수많은 관악기로 이루어진 커크의 머리는 그저 기발한 농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안에는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소리를 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들어 있다.

 

라산 로랜드 커크의 음악을 들으며 자고르스키의 커버를 다시 바라본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그림 속 악기들이 실제로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듯하다.

한 장의 음반은 그렇게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도 듣는 예술이 된다.

 

이 한장의 음반 | 함께 보는 네 장의 커버

 

1975년 Rahsaan Roland Kirk – 『The Case Of The 3 Sided Dream In Audio Color』
1976년 Rahsaan Roland Kirk – 『Other Folks’ Music』
1978년 Rahsaan Roland Kirk – 『Boogie-Woogie String Along For Real』
1990년 Rahsaan Roland Kirk – 『The Man Who Cried Fire』

 

커버 아티스트 스타니스와프 자고르스키(Stanislaw Zagorski, 1933~2025)
연주자 라산 로랜드 커크(Rahsaan Roland Kirk, 1935~1977)
 

글 ㅣ최재우 문화예술기획 제이비엠 대표

임만택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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