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선의 '화장지의 말'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3]
화장지의 말
정혜선
한산섬 달은 밝았을 거야
긴 허리끈 풀고 앉아 깊은 시름할 적에
문틈에 불어오는 여린 바람에도 파르르 함께 떨던 나
맨몸에 감은 흰옷 풀어 당신의 비밀 훔쳐주었지
말해주고 싶었어
당신 혼자 그리 끙끙댈 일 아닐 거라고
세상 등지고 문 걸어 잠그는 일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지도 않다는 걸
화장지가 풀어지고 응시의 봉합선이 뜯어지는 순간 당신은 잊겠지만 말이야
쓰고 구린 일상의 밀도 속에 나를 낭비하는 곳
공중화장실 변기 옆에 붙어 들락거리는 엉덩이에 맞장구치며 사는데
인간들이 말하는 웬만한 맛 나도 맛보지 않았겠어?
소요에서 적막을 길어 올리고
울음에서 울음 이후를 분리해 내는
들어서는 일과 나아가는 일 사이의 일주문에
생과 죽음이 걸리기도 한다는 걸
검은 비닐봉지에 든 핏덩이의 수의壽衣가 되어준 적 있어
눈물 한 방울에도 찢어지는 내가 짧은 생을
담은 한 벌의 옷이 된 적 있어
남몰래 네가 아름다운 사람이기를 바랐어
적막이 머무는 자리 오래 돌아보았기를
하루에 수백 번 문은 닫히지만 묵언의 한 칸은 영원하지 않아
―『이렇게 작아 보이는 지구 안에 그렇게 먼 길이 있었다니』(포엠포엠, 2025)에서
![화장지의 말 [이미지:차진 기자]](/_next/image?url=https://cdn.presscon.ai/prod/125/images/20250303/1740951251691_848003699.jpeg&w=828&q=100)
<해설>
이순신 장군이 쓴 시를 패러디하면서 시작된다. 우리가 하루에 화장지를 몇 미터 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용변을 볼 때 필요한 두루마리 화장지와 식사 때 뽑아서 쓰는 티슈를 합치면 최소한 3미터는 넘을 것이다. 시인은 우리가 쓰는 생활용품 가운데서도 가장 아무렇지 않게 취급하는 화장지에게 인격을 부여하여, 즉 의인화를 시켜 시를 끌고 간다.
화장지가 독백인 양 내뱉는 말 중에서 내 마음에 강하게 펀치를 먹인 것은 제5연이다. ‘핏덩이’는 낙태수술을 하여 인간에 의해 버림받은 생명체를 뜻하는 것이리라. “검은 비닐봉지에 든 핏덩이의 수의壽衣가 되어준 적 있어”란 구절은 화장지로 둘둘 만 신생아의 시체를 곧바로 떠올리게 한다. 화장지가 생명체에게 마지막으로 입히는 옷인 수의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눈물 한 방울에도 찢어지는 내”가 “짧은 생을 담은/ 한 벌의 옷이 된 적”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사람이 울 때는 화장지가 꼭 필요하다. 콧물도 함께 나오니까. 서러워 꺼이꺼이 울 때 나와 함께 해준 고마운 화장지. 내가 죽으면 누가 울어줄까. 공중화장실의 문은 하루에 수십 번 열리고 닫히겠지만 비행기 안의 문은 수백 번도 가능할 것이다.
화장지가 보니 숱한 인간의 삶이란 것이 깊은 시름에 빠지게 한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자연현상인데 그것을 위해 울고불고, 어떤 때는 구린 돈도, 어떤 훔친 돈도 썼으리라.
화장실에서의 행위는 대개 침묵 속에 이뤄지기 때문에 자기를 만나는 시간이다. 너는 너 자신을 잘 알고 있는가? 네 몸은 안전한가? 아름다움을 잘 지키고 있는가? 공중화장실 변기 옆에 있는 화장지는 인간 세상을 보면서 남몰래 네가 아름다운 사람이기를 바랐다고 말한다.
적막이 머물었던 그 자리를 오래 돌아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평소에 타인을 존중하기를, 타인과 함께 쓰는 공간을 깨끗하게 사용하기를, 자연에서 가져온 물건이니 하나라도 아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정혜선 시인은 현재 미국 워싱턴에 사는 교포 시인이다. 대학에서 일본문학과 국제학을 전공했고 직장에 다니면서 중국어를 배웠다. 일본과 미국에서 주로 살면서 시를 쓰고 있다. 공항과 비행기 안의 화장실에서 시상을 떠올린 것일까? 시인은 해우소에서도 이처럼 시를 낚을 수 있다.
정혜선 시인 프로필
경남 진주 출생. 2013년 일본 문예지 《우츄시진宇宙詩人》에 시 발표. 2014년 미국 워싱턴문인회 《워싱턴문학》 신인상 수상. 2015년 국내 시전문지 《포엠포엠》 신인상 수상. 제2회 정지용해외문학상 수상. 『이렇게 작아 보이는 지구 안에 그렇게 먼 길이 있었다니』는 첫 시집.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나무 앞에서의 기도』 『사람 사막』 등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