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흥 개인전 《탄광炭光: 빛을 캐는 시간》…폐광의 어둠에서 ‘사라지지 않는 빛’을 건져 올리다
30여 년간 ‘쉼’과 ‘명상’, 그리고 빛을 중심으로 회화 작업을 이어온 박진흥 작가가 폐광의 시간과 광부들의 삶을 ‘빛의 기억’으로 되살린다.
갤러리 반디트라소는 오는 10월 8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성북구 갤러리 반디트라소에서 박진흥 개인전 《탄광炭光: 빛을 캐는 시간(Coal Mine – Mining Light)》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삼척탄좌 정암광업소, 현재의 삼탄광산아트밸리를 여러 차례 답사하며 제작한 신작 회화 23점을 비롯해 구작 4점이 소개된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작가의 내면과 일상의 풍경을 비추던 ‘빛’이 구체적인 장소와 산업의 역사, 노동자의 몸으로 확장됐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박진흥의 최근 작업은 ‘그림자’에서 ‘빛방울’로, 다시 장소와 사람의 기억을 품은 빛으로 변화해 왔다. 2024년 《광기光記: 드리워지다》에서는 빈 하늘과 땅, 벽 위에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를 통해 현실을 바라봤고, 이후 《빛으로 가리워진 빛; 광휘로부터 태어난 그림자들》과 《빛이 여무는 자리》를 거치며 빛 자체보다 빛이 머물고 스며드는 시간에 주목해왔다. 이번 《탄광炭光》은 이러한 ‘빛의 회화’가 산업현장의 구체적인 기억과 만나는 전시다.
폐광에서 어둠보다 먼저 발견한 ‘빛’
작가는 정암광업소를 여러 날 반복해 찾았다. 1964년 문을 열어 2001년 폐광하기까지 수많은 광부들이 삶을 이어간 장소다. 그곳에서 작가가 먼저 발견한 것은 의외로 어둠이 아니라 빛이었다.

닳고 벗겨진 벽, 오래된 문, 수십 년의 시간이 겹겹이 쌓인 표면에는 밝고 선명한 빛이 아닌, 오랫동안 장소에 스며들어 ‘숙성된 기억’처럼 깊어진 빛이 남아 있었다. 작가의 시선은 이렇게 개인적이고 명상적인 빛에서 공동체의 기억과 산업유산의 시간으로 이동한다.
박진흥은 작가노트에서 “빛은 오지 않는다. 빛은 이미 거기 있다. 다만 시간 속에서 깊어질 뿐이다”라고 적었다. 그는 빛의 출발점보다는 빛이 어디에 머물고 무엇 안으로 스며드는지를 오랫동안 바라봐왔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 가운데 하나는 ‘문’이다.
문은 안과 밖을 나누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시간이 만나는 경계다.

문 안쪽에는 광부들의 삶과 오래된 공간 속에서 60여 년 동안 여물어온 빛이 있고, 문밖에는 나뭇가지와 공간을 스쳐 지나가는 현재의 빛이 존재한다. 두 빛은 서로 단절되지 않는다. 오래 머문 빛은 현재의 빛을 통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현재의 빛은 낡은 공간을 통과하면서 과거의 흔적을 불러낸다.
전시장에 선보이는 ‘기억의 문’ 연작에서 회색과 황록, 청록빛 벽을 배경으로 한 낡은 문은 단순한 건축적 소재가 아니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가느다란 가지와 얼룩, 무수한 점은 시간과 기억이 표면에 남긴 흔적처럼 존재한다.
광부의 몸으로 들어간 빛…엑스레이가 회화의 언어가 되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에 띄는 변화는 ‘사람의 몸’이 다시 작품 안으로 들어왔다는 점이다.

작가가 폐광 안에 남겨진 광부들의 물건과 엑스레이 앞에서 주목한 것은 X선 역시 ‘빛’이라는 사실이었다. 빛은 몸을 통과하고, 뼈와 폐에서 멈춰 그 흔적을 영상으로 남긴다.
특히 진폐로 굳어간 폐의 음영과 뼈 사이로 뻗은 형상은 작가가 오랫동안 화면에 그려온 나뭇가지와 겹쳐진다. 박진흥에게 몸은 이 지점에서 또 하나의 ‘문’이 된다. 빛이 가장 깊고 오래 머무른 장소이자 노동의 시간이 기록된 장소다.
검은 화면 속 푸른빛을 머금은 두개골과 흰 가지가 등장하는 ‘빛을 캐는 사람’ 연작은 이러한 변화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두개골 이미지는 단순한 죽음의 표상이 아니다. 탄광 안에서 일했던 노동자의 몸을 통과한 시간과 빛, 그리고 그 몸에 남겨진 기억을 시각적으로 환기한다. 폐광이라는 장소의 기억이 건축물의 외부에서 사람의 몸 내부로 이동하는 순간이다.
권양기, 지상과 지하를 연결한 ‘수직의 문’
정암광업소의 권양기도 이번 전시의 주요 모티프로 등장한다.
작가는 지상과 지하를 연결하며 사람을 탄광 깊숙한 곳으로 내려보내고 다시 지상으로 끌어올리던 권양기를 “매일 몸이 오르내리며 통과해야 했던 수직의 문”으로 받아들였다. 화면 속 권양기는 육중한 산업시설이면서 동시에 뼈와 가지처럼 가느다란 선으로 표현된다.
작가노트에서도 권양기는 “이번 작업에서 가장 큰 문”으로 설명된다. 열고 닫는 일반적인 문이 아니라 사람의 몸과 시간이 반복적으로 통과한 거대한 통로라는 것이다.

‘22,907일의 하늘’에서 권양기는 희미한 청록색 구조물로 화면 깊숙이 떠오른다. 주변을 가로지르는 가지들은 나무의 가지이면서 동시에 폐 속 기관지, 지하 갱도의 갈림길을 연상시킨다.
박진흥은 “이제 그 가지들은 나무의 가지이기도 하고, 몸속 깊이 뻗은 폐의 가지이기도 하며, 땅 밑으로 뻗어나간 갱도의 가지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물감층과 빛방울, 가지의 선이 중첩되며 자연과 인간의 몸, 산업현장의 공간이 하나의 회화적 언어로 연결된다.
‘빛을 캐는 시간’…산업사의 기억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
전시 제목의 ‘탄광(炭鑛)’은 작가의 화면에서 ‘탄광(炭光)’으로 바뀐다. 석탄을 캐던 장소에서 이제 작가는 빛을 캔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폐광을 단순히 산업화의 흔적이나 사라진 노동의 공간으로 기록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벽과 문, 광부의 몸, 권양기와 갱도 안에 남아 있는 빛의 흔적을 통해 사라진 것과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어떻게 함께 현재에 머무는지를 묻는다.
작가는 “어쩌면 내가 그리고 있는 것은 빛 그 자체가 아니라 빛이 시간을, 그리고 사람의 몸을 통과하며 남긴 기억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어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딘가에 머물고, 스며들고, 깊어지고, 다시 다른 빛을 만나면서 조용히 여물어 간다”고 적었다.
이번 《탄광炭光: 빛을 캐는 시간》은 박진흥의 회화가 개인의 명상과 자연의 빛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 산업사의 기억과 노동하는 인간의 몸을 바라보는 작업으로 확장됐음을 보여준다.
폐광에서 작가가 찾아낸 것은 어둠의 기록이 아니라, 그 어둠을 지나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빛이다.
전시 개요
- 전시명: 박진흥 개인전 《탄광炭光: 빛을 캐는 시간》
- 영문명: Park Jinheung Solo Exhibition 《Coal Mine – Mining Light》
- 기간: 2026년 10월 8일(목)~10월 31일(토)
- 오프닝: 2026년 10월 8일(목) 오후 4시
- 장소: 갤러리 반디트라소, 서울 성북구 성북로 49 운석빌딩 3층
- 관람시간: 화~토 오전 10시~오후 6시, 일·월요일 휴관
- 출품작: 신작 회화 23점 외
- 문의: 02-734-2312
작가 박진흥
박진흥(朴珍興, Park Jinheung, b.1972)은 인도 델리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호주 웨스턴시드니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학 석사를 마쳤다. 현재 강원도 양구에서 작업하고 있으며 개인전 18회를 비롯해 국내외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다. 2001년 호주 시드니 제6회 Blacktown City Art Exhibition 대상을 수상했으며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주호주한국영사관,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뉴델리대학 등에 소장돼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