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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이덕진의 "피의 능선"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시 해설] 이덕진의 "피의 능선"

이승하 시인
입력
2025.06.24 22:10
수정
2025.06.24 22:42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17]

 

피의 능선

 

이덕진

 

여기 지금 살육을 본다.

 

지구도 하늘도 까무러칠 듯

포는 우는데

지그시 떠오르는 아침 햇빛이

비둘기색 1211고지를 황홀히 빚어낸다.

 

악착스러운 인간의 생과 사의 찰나에,

육(肉)과 육, 피와 피의 난무!

 

아아 임리(淋漓)한 선혈이 굴곡된 계곡을 붉히고

산형(山形)이 변하여 시체가 첩첩할 때

능선은 피를 빠는 하나의 악귀

 

만대에 계승될 또 하나의 피비린내 나는

장엄한 전설이 생겼다.

태고와 같은 전장,

전우는 용감히 쓰러진 전우를 다시 부른다.

                                 

 ㅡ《전선문학》 제1집(육군종군작가단, 1952.4)

 

  

피의 능선 [ 사진: 국가보훈처]

[해설]

 

   한국전쟁 중 피의 능선에서

 

  문명의 역사는 무기 개발의 역사, 전쟁의 역사다. 문화의 역사는 예술의 역사, 문학의 역사다. 문명은 자연에 반하지만 문화는 자연과의 조화가 중요하다. 1950년 6월 25일, 동이 막 트려고 하는데 삼팔선 전 전선에 포성이 울려 퍼졌다.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피의 능선 전투’는 1951년 8월 중순부터 11월 하순까지, 강원도 양구 동북부 펀치볼 지역의 피의 능선을 비롯한 가칠봉, 1211고지, 1052고지 등에서 국군 3, 5사단과 공산군 5, 6, 27사단 간에 벌어진 전투로, 한국전쟁사에 있어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이덕진은 육군종군작가단에 소속되어 있던 문인으로서 피의 능선 전투에 참전했던 현역군인은 아니었지만 그 전투의 치열함을 묘사하고픈 심정에 사로잡혔다.

 

  신문기사를 참고하였고 부상병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전투에 대해 들은 것을 메모하였다. 그리하여 전투 장면을 한 편의 시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인은 “산형이 변하여 시체가 첩첩할 때” 같은 묘사를 통해 전투의 실상을 전달하는 한편, “능선은 피를 빠는 하나의 악귀”라고 표현하면서 전쟁의 무자비함을 비판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전투에서의 승리를 예찬하지는 않았지만 국군의 용감성에 대한 말을 빠뜨리지 않음으로써 이 시를 읽는 이가 국군이든 민간인이든 용기를 주려고 한 시인의 의도가 충분히 감지된다.

 

  이 시는 인민군의 남침을 비판하거나 중공군의 참전을 비판하는 노골적인 반공주의 사상에 입각해 쓴 것이 아니다. 전투 장면을 그리는 과정에서 마치 영화 촬영을 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성을 확보하였다. 1952년 5월 1일에 공산군은 전 전선에서 5,600발의 포탄을 발사했고 이에 질세라 유엔군의 공군은 평양과 해주를 폭격하였다.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던 시점에 후방에서 창간된 《戰線文學》에 실린 시여서 그런지 공간적 배경으로 전장을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75주년을 맞은 오늘, 피의 능선 전투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한 이 시를 읽어보면서 전쟁 억지력은 역시 경제력과 국방력에 있음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핵무기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북한의 김정은은 호시탐탐 대남적화를 노리고 있지만….

 

  [이덕진 시인]

 

  1923년 서울서 출생해 1978년에 작고하였다. 1943년 덕수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1944년 상하이의 동문서원(同文書院) 예과에서 수학하였다. 당시 난징[南京] 주둔 일본 부대인 금릉부대(金陵部隊)로 강제징용되었고, 광복 후인 1946년에 귀국하였다. 1949년 동국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하고, 충주고등학교와 성남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51년에는 종군작가단에 참가, 상임감사를 역임하였다. 대구로 피난 가 그곳에서 피난연합중고등학교와 효성여자고등학교 등의 교사,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 등을 역임하였다. 연합신문사 문화부장과 경향신문사 조사부장을 지냈으며 《전선문학》《자유문학》 등의 편집장과 자유문학가협회 중앙위원을 역임하였다. 동국대학교 재학 때에 동인지 『해바라기』를 주관하면서 시를 발표하였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시와시학상편운상가톨릭문학상유심작품상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shpoe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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