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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해설] 김선호의 "이력서"
문학/출판/인문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시조 해설] 김선호의 "이력서"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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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27]

이력서

 

김선호

 

 

아버지의 눈빛이 엄마에게 머물면서

출토된 유물처럼 내 이력도 꿈틀댄다

한 생애 지난 좌표가 박물관에 걸린다

 

돌처럼 순수했던 유년을 돌아보면

비사치기 공기놀이 편을 갈라 견주어도

웃음꽃 잔돌에 피운 석기시대 언저리다

 

가슴속 푸른 꿈이 활활 타던 청년기는

질풍노도 다스리고 사리를 분별하며

양심도 구릿빛이던 청동기시대 즈음이다

 

이리저리 치이면서 벼랑 끝에 몰린 지금

뾰족하게 날 세우고 무쇠 녹여 방패 들고

앗아야 맘이 놓이는 철기시대 무렵이다

 

AI에 챗지피티 세상 온통 첨단인데

박제된 선사시대 에헴 하는 이력서를

어디서 받아주려나 화성에나 내볼까

 

ㅡ『자유를 인수분해하다』(고두미, 2025)

  

이 시조해설에 맞는 이미지를 글자없이 나이든 한국 중년남자가 취직하기 위해 일자리센터에서 기웃거리는 장면
[이미지 : 류우강 기자]

 [해설] 

 

  인류의 역사, 아버지의 역사

 

  대학의 교양과목 중에 글쓰기 관련 과목이 있는데 강사가 가장 강조하는 것이 이력서 쓰는 법과 자기소개서 쓰는 법이다. 심사자의 마음에 쏙 들게끔 스펙(한국과 일본에서만 쓰는 말. specification이 맞다)을 자랑하고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회사의 역사를 꿰고 있어야 하고 사주의 경영철학을 암기하고 있어야 한다. 취준생이라면 이력서 30통은 기본이리라.

 

  졸업 후 바로 취직하지 못하는 아들이 집안에 침묵을 몰고 왔다. 아들의 이력이 어떠하였기에 아버지의 눈빛이 엄마에게 머물렀을까. 엄마가 좀 무섭다. 아버지의 이력이 휘황찬란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출토된 유물처럼 내 이력도 꿈틀대고 아버지의 “한 생애 지난 좌표가 박물관에 걸린다”는 것은 부전자전을 말하는 것이리라. 쟤 이제는 취직해야 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좀 어떻게 알아봐야 하지 않나요? 한 사람은 정년퇴임을 한 실업자요 한 사람은 만년 취준생이니 엄마 이마의 골이 깊다.

 

  이 시조의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수는 아버지의 이력서다. 유년기(석기시대), 청년기(청동기시대), 장년기(철기시대)를 거쳐온 아버지는 이제 막 노년기에 이르렀는데 아뿔싸! “AI에 챗지피티 세상 온통 첨단”이라 아버지의 재취업은 불가능해졌고 아들의 취업마저 쉽지 않게 되었다. AI에 챗지피티 세상이 됨으로써 위협받게 된 직업군인 고객 서비스 및 콜센터 직원, 사무 행정직(문서 작성, 데이터 입력, 일정 관리 등 반복적인 사무 업무를 하는 사람), 번역가 및 통역사, 콘텐츠 작성자(간단한 기사, 블로그 포스트, 제품 설명 등을 생성하는 사람), 데이터 분석가 및 보고서 작성자, 법률 문서 작성 및 검토하는 사람(법률상담사, 법률사무소 직원)은 이제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나.

 

  지금까지 부자가 쓸 수 있는 이력서는 “박제된 선사시대 에헴 하는 이력서”다. 60밖에 안 된 아버지의 이력서나 이제 스물 몇 살인 아들의 이력서를 받아줄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화성에나 내볼까? 으흐흑, 어떻게 이런 세상이 되었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쓰기, 기사 작성과 보고서 작성 등을 잘했다고 교양과목 A+를 받았는데.

 

  [김선호 시조시인]

 

  1958년 충주에서 태어났다.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으밀아밀』  3권의 시조집을 냈고, 김상옥백자예술상, 전영택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시조시인협회, 나래시조시인협회, 충북시조시인협회 등에서 활동하며, 《코리아아트뉴스http://koreaartnews.com》에 ‘김선호의 時부렁調부렁’을 연재하고 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시와시학상편운상가톨릭문학상유심작품상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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