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59] 최영효의 “한라산”
한라산
최영효
어디서 눈을 들어도 구름 속 저기 서 있다
오름이 오름을 받쳐 하늘 하나 보듬고 산다
딱 한 번 말을 뱉고는 입을 다문 저 사나이
아버지 돌팔매 맞고 가신지 하마 내 나이
휴화산 이름 하나로 참고 또 기다린다만
모슬포 돌개바람이 수선화 잠을 깨운다
구름의 높이에서 먼 북쪽 평원을 그려
살아 온 시간의 멍에 누군들 기적 아니랴
가슴 속 불을 내리면 아플 일 하나도 없다
이 시조에서 한라산은 단순한 자연 풍경이 아니다. 시인은 한라산을 하나의 거대한 인간 형상으로 불러내며, 침묵과 인내, 기다림과 초월의 시간을 살아온 존재로 재구성한다. 산은 배경이 아니라 인격이며, 시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는 ‘말하지 않는 존재의 깊이’에 있다.
첫 수에서 시인은 “어디서 눈을 들어도 구름 속 저기 서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한라산은 공간적 중심을 넘어 정신적 축이 된다. 제주 어디에서 바라보아도 산은 늘 같은 자리에서 세상을 내려다본다. 인간은 흔들리고 계절은 바뀌지만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 특히 “오름이 오름을 받쳐 하늘 하나 보듬고 산다”는 구절은 매우 인상적이다. 수많은 오름은 자식처럼, 혹은 세월의 층위처럼 한라산을 떠받든다. 이어지는 “딱 한 번 말을 뱉고는 입을 다문 저 사나이”는 시의 핵심 이미지다. 이는 화산 폭발이라는 자연현상을 인간의 언어 행위로의 치환이라고 본다.
둘째 수에서 시의 시선은 역사와 시간으로 옮겨간다. “아버지 돌팔매 맞고 가신지 하마 내 나이”라는 표현은 개인적 상실을 넘어 제주의 집단 기억을 환기한다. 아버지는 실제 혈육일 수도 있으나, 더 넓게는 떠나간 세대와 상처 입은 역사 자체를 의미한다. 돌팔매는 삶의 폭력이며 시대의 냉혹함이다. 산은 그 모든 시간을 지켜보며 늙어 왔다.
그럼에도 한라산은 “휴화산 이름 하나로 참고 또 기다린다.” 휴화산이라는 말은 이미 꺼진 것이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가능성이다. 그리고 “모슬포 돌개바람이 수선화 잠을 깨운다.” 이 구절에서 바람은 변화의 힘이며 수선화는 깨어나는 생명이다. 차갑고 거친 바람조차 결국 꽃을 피우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 수는 시적 깊이가 가장 농밀하다. “구름의 높이에서 먼 북쪽 평원을 그려”라는 대목은 한라산의 시선이 제주를 넘어 더 넓은 세계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살아 온 시간의 멍에 누군들 기적 아니랴”라는 구절은 이 시의 사유를 집약한다. 살아낸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적이라는 깨달음이다. 누구에게나 짐은 있었고 누구에게나 돌개바람은 있었다. “가슴 속 불을 내리면 아플 일 하나도 없다”는 종장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다. 불은 욕망이고 분노이며 미련이다. 그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동양적 초월미가 보인다.
결국 이 시의 한라산은 제주의 산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자화상이라고 보았다. 높아서 산이 된 것이 아니라, 오래 견디어 산이 된 존재,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품고 있는 거대한 침묵의 얼굴이다.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