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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설] 이성열의 "하얀 텃세"
문학/출판
시 /시조

[시 해설] 이성열의 "하얀 텃세"

KAN 편집국 기자
입력
수정2025.03.12 23:44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13 ]

하얀 텃세

 

이성열

 

 

값 깎으려면 당신 나라로 가서나 깎아!”

파머스마켓에서 과일을 집고 우수리 좀 깎으려니

배불뚝이 중년의 백인 남자가 무뚝뚝하게 내뱉는다

당신도 그럼 당신 나라로 돌아가!”

여기가 내 나라야! 나는 여기서 태어났어!”

나도 여기가 내 나라야! 나도… 세…, 세금을 내니까…

가만, 아마도 당신은 여기서 태어났을지 모르지

하지만 당신 아버지, 또 할아버지는

나처럼 어디선가 이리로 왔을 것 아니야?”

 

그들은 나를 이민자라 부른다

내가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자기들과 피부색이 다르다고

나에게 아예 낙인을 찍으려 한다 허나

우리 모두는 어느 특정한 곳에 사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누구도 어떤 사정 없이는 정든 고향 집 떠나길 원치 않는다

 

물고기, 새들은 철 따라 옮겨가며 살고

어떤 동물들은 텃새처럼 텃세를 좀 한다지만

사람들은 어떤가? 너무 심하다 못해 서로 증오하고

전쟁까지도 마다하지 아니한다

차별은 지능과 관계가 있는 걸까? 아니면

사람이 물고기, 새보다도 너그럽지 못한 걸까?

지구인이면 누구나 브론테 자매를 읽고 공감하는데

원주민과 이주민이 뭐가 그렇게 다른가?

 

우리들 세상, 우주는 어딜 가나 흙과 바위, 공기와 물

똑같은 성분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니 미물, 짐승이라도

너무 괄시 마라 어디서 살건 우리는 다 같은 우주의 산물

 

―『하얀 텃세』(청동거울, 2006)에서

 

 “값 깎으려면 당신 나라로 가서나 깎아!”  [이미지 : 차진 기자 ] 

 

  [해설]

 

  이주민의 설움을 노래하다

 

  800만 해외 교민 중 한 사람인 재미교포 시인 이성열(19462025) 씨의 부고를 들었다. 삼가 명복을 빈다. 미국 LA의 미주한국문인협회 여름 문학 캠프에 두 차례 초대받아 갔을 때 밤을 꼬박 새우며 이야기꽃을 피웠었다. 장례식에 참석할 수도 없었고, 이역만리 서울에서 고인이 된 시인의 시를 읽어본다.

 

  해외에 이민을 가면 3중고를 겪는다. 언어 소통의 어려움. 지역 원주민들의 은근한 차별.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래도 어쩔 것인가. 그 사회에 적응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 농산물 직거래 장터인 파머스마켓(Farmers Market)에서 시인이 직접 겪은 일일 것이다. 몇 푼 우수리 돈을 깎으려다가 백인 주인 남자의 핀잔을 듣는다. “값 깎으려면 당신 나라로 가서나 깎아!”라고. ‘하얀 텃새의 텃세가 심하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씁쓸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이주민이지만 세금을 내고 있으니까 나도 여기가 내 나라라고 항변한다. 그런데 미대륙의 원래 주인은 백인이 아니고 인디언이었다. 인디언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한 침략자의 후손인데 원주민처럼 굴고 있는 것이다.

 

  이민자들이 겪는 설움은 이 정도가 아닐 것이다. 주류와 비주류로 편을 가르는 인간들이 있어 사사건건 차별을 당하지만 어찌할 것인가. 참는 수밖에. 참지 못해 2007년 버지니아공대 유학생 조승희는 총기를 난사, 9분 만에 32명의 교수와 학생의 목숨을 빼앗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자살하기도 했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이지만 1992년의 LA 폭동도 떠올려보면 텃새들의 텃세는 피를 불러올 수가 있다.

 

  시인은 외친다. 원주민과 이주민이 뭐가 그렇게 크게 다른가? 하고. 다 사해동포(四海同胞)고 인류의 일원이고 동시대인이다. 어울려 살아도 인생이란 고해이거늘 먼저 와서 살기 시작했다고 나중에 온 사람들을 차별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데 재미교포, 재일교포, 중국 조선족, 중앙아시아 고려인, 연해주 한인, 사할린 교포, 호주 교민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눈물겹다. 존경심을 갖고 바라보게 된다. 이 시의 결구인 어디서 살건 우리는 다 같은 우주의 산물앞에서 고개를 힘껏 끄덕이게 된다. 그래, 서로 돕고 살면 좋은 것을. 전학 온 친구에게 친절하게 대해 우리 학교에 적응하게 하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성열 시인의 약력]

이성열 시인(왼쪽에서 두번째)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시낭송을 한 후 현지 시인들과 함께 기념 촬영하는 장면 [사진: 미주한국문인협회 제공]

  이성열 시인은 1946년 경기도 화성 출생으로 1976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건국대와 미국 조지아주립대를 다녔으며 캘리포니아주립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86년 미국 산타크루즈 소재 미국시인협회(APA)의 우수신인상을 받으며 미국 문단에 등단했다. 1994년에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무임승차」가 당선되었다. 2003년 영시 「The Belt」로 LA 아로요 재단이 수여하는 진열장의 시상을 수상했다. 영시집 『Stray Dogs』와 소설집 『The Winner’s Game』을 내 미국 문단에 널리 알려졌다. 한국에서는 시집 『바람은 하늘나무』 『하얀 텃세』 『구르는 나무』, 루미 시의 한글 번역시집 『입술 없는 꽃』을 냈다. 미주한국문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경희해외동포문학상, 미주문학상, 이병주국제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나무 앞에서의 기도』 『사람 사막』 등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KAN 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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