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기행] 조선화첩 따라 제주를 즐기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를 따라
(사)제주문화역사나들이, 조선시대 화첩따라 제주를 탐방하다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걸어보는 일은 몇 백 년 전의 타임캡슐을 꺼내 열어보는 것처럼 설레고 두근거리는 일이다.
사단법인 제주문화역사나들이는 한 달에 한 번씩 문화역사나들이 기행을 한다. 지난 4월 27일 기행은 탐라순력도 두 번째 행사로 별방진성, 성산관일, 수산진성, 정의현성을 둘러봤다.
탐라순력도는 조선(숙종 28년) 1702년 당시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였던 이형상이 제주고을을 돌면서 방어실태와 백성의 풍속, 생활상, 명승을 기록한 채색 화첩을 말한다.

◈ 별방진성(別方鎭城), 이름 모를 손들의 체온
![원형 별방진성 [사진: 강영임기자]](https://imageproxy.presscon.ai/800x/https://cdn.presscon.ai/prod/125/images/20250429/1745926991663_477724915.jpg)
별방진성은 구죄읍 하도리에 위치한 진성으로 둘레는 1,008m, 높이 4m, 타원형 성곽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처음 본 곳은 깔끔하게 잘 다듬어져 복원된 진성이었다. 홍기표 문학박사(전 제주역사문화진흥원장)는 사람들이 찾는 진성은 복원된 진성만 보고 있다면서, 서성 쪽 옛 원형 성곽인 별방진성으로 안내해주었다. 그곳은 탐라순력도 속 옛 그림처럼 성벽은 낮고 세월이 두텁게 내려앉아 있었다. 적을 막기 위해 이 성을 쌓느라, 사람들은 밤에 작은 불을 피우고 바다를 바라보며 하루를 지키며 살았을 것이다. 그 돌 사이사이에 스며든 이름 모를 손들의 체온, 무거운 날숨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 성산관일(城山觀日), 아름다움 뒤에 침묵

성산일출봉은 바다에서 바라볼 때는 마치 왕관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고, 하늘에서 바라보면 거대한 바다거북이 대양을 헤엄쳐 나가고 있는 형상이다. 이처럼 뛰어난 경관과 학술적 가치 때문에 제주특별자치도의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의 이름으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다. 성산일출봉에 아름다움은 이원진, 이원조를 비롯한 많은 문장가들이 화려한 문구와 멋 들여진 묘사로 성산을 표현했다. 그중에서도 조선 천재 시인인 백호 임제는 “한 송이 푸른 연꽃이 파도 사이에 꽂혀 솟아오른 듯하다”라고 칭송했다.
이러한 아름다움 뒤편에는 ‘제주 4·3 성산읍 추모 공원’이 있다. 성산읍을 비롯하여 구좌읍, 표선면 심지어 남원읍 양민들까지 학살당했다. 학살당한 이들이 400여 명이 된다고 한다. 그런 비극이 재현되지 않도록, 교육의 장으로 추모비와 조그만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탐라순력도 한 모퉁인 성산일출봉 위에는 해가 걸리고 이형상 목사는 붓을 들었지만, 바다는 숨을 죽이고 광치기 해변에는 돌보다 무거운 침묵들이 내려앉는다. 그 침묵은 덧붙이는 어떤 말도 허락하지 않는다. 광치기 해변에서는 순비기나무가 낮게, 그저 낮게 뻗어갈 뿐이다.
◈ 수산진성(水山鎭城), 아이들 웃음소리 따라

1300년(충렬왕 26) 원나라는 탐라에 탐라치(塔剌赤)를 보내 말 160필을 수산평(水山坪)에서 방목했는데, 그곳이 수산진성이다. 현재 수산초등학교가 있는 곳이 수산진이며, 동쪽으로는 성산 일출봉 봉수가 있고, 남동쪽으로는 섭지코지가 있다. 남쪽 수산봉 정상에 봉수대가 있으며, 동남쪽 해변으로는 환해장성이 있다. 수산진성은 지금 성채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동측 성벽과 북측 성벽이 만나는 지점에는 ‘진안 할망당’이라 부르는 당(堂)이 성벽 안에 본래 모습으로 자리 잡

고 있다.
수산진성은 다른 진성과 비교해 볼 때 해안을 방어하기 위한 성으로 보기에는 내륙으로 치우쳐 있으며, 성의 축조 방식과 평면형 등이 대정현성 및 정의현성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군사적 기능 외에 읍성의 역할을 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홍기표 문학박사는 말했다.
탐라순력도 속 오래된 선 하나를 따라 수산초등학교에 멈춰서면 바다는 멀고, 웅장하게 자란 나무들 사이로, 부는 바람은 가깝다. 그 옛날 읍성 안에서 장터를 오가는 이들과 돌담을 따라 뛰어다녔을 아이들의 웃음소리, 돌담 모서리에 부딪히는 저녁밥 냄새가 코끝에 머물다 흩어진다.
◈ 정의현성(旌義縣城),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

조선시대에는 제주도를 크게 세 지역(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으로 나눴는데, 그중 하나인 정의현의 도읍지는 본래 성산읍 고성리였다. 그러나 도읍지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표선면 성읍리로 옮겨졌다. 그 중심 성곽이 정의현성이다. 단순한 방어의 성이 아니라 행정기관인 근민헌, 대변청, 군관청, 보민창, 향사등, 정의향교가 세워졌다. 뿐만 아니라 치안, 상업의 중심지였으며, 지금은 제주 전통 마을의 원형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로 자리 잡고 있다.

탐라순력도 속 정의현성은 높지도 웅장하지도 않다. 돌담은 겸손하고 성문은 나지막하고 걸음걸음마다 쌓인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이 담벼락에 가득하다. 성은 언젠가 무너지겠지만, 의로운 것을 드러내고 삶을 지키려 했던 마음은 오래도록 시간 너머에 머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