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73] 서연정의 “팽목항에서”
팽목항에서
서연정
늦은 출발이네 구부러진 세월의 길
눈물이 부끄러워 저물어 도착하네
산발한 바닷바람이 달려드는 팽목항
거대한 검은 짐승 심해에 도사렸네
거짓은 암수한몸 진저리 칠 때마다
더러운 비밀의 비늘이 한 움큼 떨어지네
암흑 속에 피어난 촛불은 지상의 별
불씨가 옮아가는 엄숙한 순간에도
밀실은 재구성 하네 그들끼리의 판타지
기억하라 기억하라 고통을 잊지 말라
슬픔의 정수리에 바늘이 꽂히운 듯
점멸을 멈추지 않네 팽목항 붉은 등대
서연정의 시조 「팽목항에서」는 세월호 참사를 배경으로 하여 단순한 추모를 넘어, 진실을 외면한 시대와 끝내 꺼지지 않는 기억의 윤리를 성찰하는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비극의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첫 수의 “늦은 출발이네 구부러진 세월의 길”에서 ‘세월’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하나는 흘러가는 시간이며, 다른 하나는 참사의 이름인 세월호를 암시한다. 따라서 ‘구부러진 세월의 길’은 단순히 인생의 굴곡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 이후 뒤틀린 사회의 시간과 진실 규명의 험난한 과정을 함께 드러내는 표현이다. 또한 “눈물이 부끄러워 저물어 도착하네”에서는 눈물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존재처럼 묘사된다. 화자는 차마 드러내지 못한 슬픔을 황혼의 어둠 속에 숨긴 채 팽목항에 이른다. 이어지는 “산발한 바닷바람이 달려드는 팽목항”은 바닷바람을 머리를 헝클어뜨린 사람처럼 형상화한 표현이다. 바람이 ‘달려든다’는 역동적 동사는 팽목항 전체가 비통함 속에서 몸부림치는 공간임을 보여 준다.
둘째 수는 진실을 삼켜 버린 거대한 악의 실체를 폭로한다. “거대한 검은 짐승 심해에 도사렸네”에서 검은 짐승은 실제 동물이 아니라 탐욕, 무능, 은폐 세력 등의 포괄이다. 심해에 숨어 있는 짐승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 권력의 공포를 극대화한다. 또한 “거짓은 암수한몸”이라는 표현은 거짓이 서로 결탁하여 증식하는 구조를 드러내는 독창적 은유이다. 특히 “더러운 비밀의 비늘이 한 움큼 떨어지네”에서는 비밀이 비늘을 가진 생명체처럼 묘사된다.
셋째 수에서 분위기는 저항과 연대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암흑 속에 피어난 촛불은 지상의 별”이라는 구절은 촛불을 하늘의 별에 대응시킨다.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시민들의 양심과 희망이 별빛처럼 빛난다는 뜻이다. “불씨가 옮아가는 엄숙한 순간” 역시 촛불이 스스로 생명을 이어 가는 듯한 표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숭고한 연대의 순간에도 “밀실은 재구성 하네 그들끼리의 판타지”라고 말함으로써, 권력은 여전히 자신들에게 유리한 허구의 서사를 만들어 낸다는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마지막 수는 작품 전체의 핵심 주제를 집약한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고통을 잊지 말라”는 반복법을 통해 기억의 윤리를 강하게 환기한다. 이어 “슬픔의 정수리에 바늘이 꽂히운 듯”이라는 표현은 고통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육체를 관통하는 실재적 통증임을 느끼게 한다. 마지막 구절 “점멸을 멈추지 않네 팽목항 붉은 등대”에서 등대는 단순한 항로 표지가 아니다. 끊임없이 깜빡이며 기억을 호명하는 증언자이다.
결국 「팽목항에서」는 팽목항이라는 실제 공간을 넘어, 우리 사회의 양심이 시험받는 정신적 공간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시인은 세월이라는 언어로 뒤틀린 시대를 드러내고, 바람과 눈물, 비극의 감정을 생명 있게 전달하며, 검은 짐승과 촛불, 별을 통해 악과 희망의 대립 구조를 선명하게 부각한다. 또한 정지된 풍경에 생동감을 부여하여 독자가 팽목항의 차가운 바람과 붉은 등대의 점멸을 직접 체험하게 만든다. 이러한 수사적 장치들은 서로 긴밀히 호응하며, 이 작품을 단순한 추모시가 아니라 기억과 진실, 그리고 공동체의 윤리를 성찰하게 하는 현대 시조로 완성시키고 있다.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